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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인플레이션이 온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을 포함한 세계 선진국 경제에서 잊힌 말이 있다. 인플레이션이다. 물가는 오르고 돈값은 떨어져 삶의 질이 나날이 나빠지는 상황은 청년 세대의 기억엔 없다. 두 해 전 전세금 1억원이 올해 2억원이 되거나, 어제 달걀 한 판이 오늘 스무 개가 되는 세상에서 평온한 일상은 손쉽게 붕괴한다. 1970년대 말에 한 해 물가가 20~30% 상승하는 세상에서 겪었던 일이다.

그런데 최근 물가 조짐이 이상하다. 농산물 가격, 국제 원자재 가격 등이 오르면서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2.4% 상승해 9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3개월 연속 상승폭이 2%를 넘겼다.

한국만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4월 말 물가상승률도 3.3%에 이르러 12년 만에 최고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각국의 천문학적 재정지출과 백신 보급에 따른 보복 소비 등이 일차 원인이다. 각국 정부는 단기 현상이라고 주장하나, 6월 초 도이체방크가 인플레이션 시한폭탄을 경고하는 등 논쟁이 치열하다.

인구대역전(이성의힘, 2021)에서 영국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와 마노즈 프라단은 지난 30년간 세계 경제 흐름을 통찰하면서 인플레이션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그동안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한 힘은 노동인구 급증이었다. 1990년 이후 베이비붐 세대와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와 함께, 중국·동유럽 등에서 20억명 이상 대규모 노동력이 세계 경제에 편입됐다.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한 중국의 부상이 저물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호시절은 끝났다. 저출산 고령화 탓이다. 중국과 동유럽 모두 인구절벽이 다가오고, 생산가능인구가 감소 중이다. 노동력 공급이 줄면 임금 상승이 뒤따르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5~6년 전부터 중국의 임금 상승이 확연한 것이 심상치 않다.

관련한 부양비 증가도 물가 상승 요인이다. 생산인구는 소비보다 생산을 많이 해 공급을 늘리므로 물가 하락 효과를 가져오나, 노인 등 피부양 인구는 주로 소비만 하므로 인플레이션 효과를 일으킨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 인구의 고령화는 자연스레 고물가의 전조가 된다.

또한 인간은 젊을 때 일해서 저축하고, 나이 들면 그 돈으로 살아간다. 노동인구 증가는 저축을 늘려 저금리로 이어지나, 고령화는 반대 효과를 낳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저축액이 감소로 돌아서면서, 글로벌 과잉 저축에 따른 저금리 시대는 끝났다. 금리 인상은 곧바로 자산 거품 붕괴로 이어진다. ‘빚투’ ‘영끌’이 장기적으로 위험한 이유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는 각국 관세장벽을 철폐해 선진국 제조업의 해외 이전을 촉진함으로써, 선진국 일자리를 줄이고 신흥공업국 일자리를 늘렸다. 이는 노동 소득의 상대적 감소와 불평등 증가라는 효과를 낳는 한편, 교역 확대에 따른 저물가 고성장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이 상징하는 보호무역의 등장은 향후 세계 경제 흐름을 역류시킬 가망성이 높다.

저자들에 따르면, 향후 30년 세계 경제는 노동력 감소와 부양비 증가, 금리 상승과 부채 부담 증폭, 역세계화와 성장 둔화로 재정 및 통화 정책이 무용한 장기 인플레이션 시대에 돌입한다.

합계 출산율 0.86의 인구 감소 국가인 한국도 시한폭탄을 안은 셈이다. 청년, 여성, 노인, 장애인의 일자리 창출로 노동력을 늘려서 부양비 부담을 줄이고, 금리 인상·증세 등 선제적 부채 관리로 다가올 재앙에 대비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