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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문득문득 편집이야기

[문득문득 편집이야기 01] 편집자의 기원

편집자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문헌으로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책의 기원에서부터 편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수메르 시대 점토판에도 글자를 고친 흔적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출판을 염두에 두면, 서양에서 편집자는, 이슬람의 그리스로마 문헌들이 차례로 번역되어 출판되던 ‘중세 해석자 혁명’ 전후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11세기에 띄어쓰기와 어순이 나타나면서 글의 체계가 정립되었고, 13세기에는 여러 가지 구두점이 발명되어 퍼져나가면서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가 소멸했다. 14세기에는 책의 조직화가 더욱더 진전되면서 장절과 단락이 등장하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목차가 탄생했다. 따라서 출판 과정에서 글을 수정하고 조직하는 편집 행위가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책의 기본 격이 마련되어 이를 구현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출현했다. 그러니까 필사본 시대에도 편집자는 존재했던 것이다.

인쇄 혁명 이후, 시장을 통해서 책의 대량생산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이 나타났다. 이 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낸 사람은 베네치아의 출판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1449~1515)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출판 혁명으로 바꾸어놓은 사람으로, 현대적 출판인(publisher)의 기원이라 할 만한 사람이다. 1490년께 르네상스의 심장인 베네치아에서 출판 활동을 시작했으며,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도, 간편하고 다루기 쉬우며, 가격은 저렴한 책을 펴내겠다는 포부를 실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등 희랍과 라틴의 고전 작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널리 보급되면서 르네상스의 촉매가 되었다. 그는 에라스뮈스 등의 학자를 편집자로 영입하여 텍스트 비판 작업을 거쳐 판본을 확정해 고전작품을 출판하는 현대적 편집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1000부 이상을 한 번에 인쇄하는 대량생산을 시행해 책 가격을 파격적으로 떨어뜨렸고, 부족한 독자를 창출하려고 사전과 문법 교재를 출판함으로써 책만 있으면 누구나 학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마누티우스는 모든 사람이 책을 손에 들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손안의 책’이라는 출판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현대의 신국판 판형과 비슷한 크기의 8절판 서적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좁은 공간에 많은 글자를 넣고도 가독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벰보체를 개발하고 이탤릭체를 창안했으며, 세미콜론과 갈고리 모양 쉼표 등 구두점을 발명했다.

‘손안의 책’이야말로 출판의 진짜 모습이다. 출판이란, 책을 팔아 밥을 버는 일이 아니라 소수만 알던 지식에 만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끝없이 발명하는 일이다. 르네상스도, 종교개혁도, 과학혁명도, 결국 ‘손안의 책’에서 흘러나간 물줄기로서 갖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일로부터, 즉 ‘지식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출판의 임무다.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영원히 그 상징으로 남았다.

하지만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순수한 편집자라기보다 경영자 정체성이 강한 사람, 즉 출판인이었다. 경영과 분리된 채 편집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언제 등장했을까. 일반적으로 1600년대에 이러한 직업인, 즉 편집자(editor)의 등장이 확연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쇄혁명에 이은 출판혁명은 ‘표준화’라는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만들었다. 구술과 필사의 시대에 흔했던 청자/독자를 위한 순간적 변형은 철지난 유행이 되었고, 마누티우스가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 지식을 정리해서 고정하고 그 체계를 잡아 책을 펴내는 것이 인쇄 시대에 적합했다. 이에 따라 출판사 별로 교정교열 등을 비롯한 편집 규칙이 마련되었고, 이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면서 책을 특정한 모양으로 구조화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나 직업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적 의미의 편집자, 즉 저자의 상대 개념으로 ‘책의 기획’까지 전담하는 편집자는 언제부터였을까. 이러한 편집자는 18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19세기에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 과정은 저작권의 탄생 과정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

현대 출판에서 말하는 저자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이라는 형태로 지적 재산을 생산하는 사람’을 말한다. 저작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저작권법은 151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졌고, 1710년 영국에서 저작권법이 시행되면서 널리 지켜지기 시작해 1886년 베른협약을 통해서 국제 표준 질서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로, 글을 써서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이 출현했고, 지적 재산에 대한 저자의 권리 의식이 높아졌다. 거기에서 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에이전트가 출판의 세계에 나타났다.

이에 따라 출판 관련 계약도 점차 복잡해지고, 출판은 귀족들이 즐기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산업으로 변해 갔다. 출판인들도 저자를 직접 상대하면서 발생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는 대신, 자본만 투자하고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임명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지식인을 고용해 원고를 검토하고 출판을 결정할 권리를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의 편집자는 여기에서 기원한다.

1724년 설립된 영국의 롱맨 출판사(사전으로 유명한 바로 그 회사다)에서 가족, 친구 등 친족 구조 중심으로 출판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리더(reader)를 고용해 출판 기획을 전담하도록 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경영과 편집의 분리, 이로부터 현대 출판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주 먼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