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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독자 발굴의 시대



책장을 정리하면서 뒤늦게 《세계의 문학》 2015년 여름호를 다시 읽는다. ‘독자 발굴의 시대’를 특집으로 하고 있다. 서동욱이 쓴 ‘기획의 말’을 조금 옮겨 둔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고, 편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젠 읽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다행히 씨가 말라 버렸다고 해도 좋을 어설픈 엘리트주의는 독자를 깨우쳐야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독자란 깨우쳐야 할 무지의 계란을 품에 안은 자가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는 자, 자신이 설정한 문제를 위해 책을 구성해 주기를 저자에게 요구하는 자이다. 독자를 발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이란, 저자로부터 독자에게 보물이 뚝 떨어지는 수동적인 수혜의 장이 될 수 없고, 독자의 요구라는 보이지 않는 지도에 따라 출판이 길을 찾아 가는 어려운 택시 운전 같은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더욱더 섬세한 결(주제의 기상천외함이나 시의성 등의 차원에서)을 가지는 대중 강연의 확산이나 출판물의 기획은, 이 택시 운행이 도로를 더욱더 높은 비율로 점유하고 있다는 교통방송의 고지 같은 것이리라. (서동욱, 「독자 발굴의 시대」, 336쪽)


정여울은 정재승, 최진석과 함께한 대담 「대중 강연 시대의 인문학과 과학」에서 이 말에 호응한다. 같이 기록해 둔다.


저는 ‘독자 발굴’이란 것이 지식인이나 필자가 독자‘를’ 발굴하는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독자‘가’ 우리 안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독자는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 강연을 통해 지식인과 전문가가 ‘독자 발굴’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지만, 또 거꾸로 ‘대중들이 스스로’ 지식인과 전문가가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사유의 씨앗’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더 깊이 ‘발굴’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354쪽)


오늘날 출판의 가장 큰 주제는 ‘독자’다. 박혜진의 글 「독자 쇼크」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선언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독자는 출판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거기 있다는 것이 인식되는 부수적 존재였다. 소량의 책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읽히던 시절, 독자는 출판의 후방에서 완성된 책을 소개받는 홍보 대상으로 존재해도 무방했다. 문제는 다량의 책이 소수의 독자에게 제공되고 있는 지금, 독자의 전지 배치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출판의 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372~373쪽)


지식과 독자 사이의 연결을 책이 거의 독점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저자와 독자, 책과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약한 연결을 강한 연결로 바꾸지 않으면 출판이 위기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문제는 ‘약한 연결’은 콘텐츠의 확산이 쉽지만, ‘강한 연결’은 콘텐츠의 확산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깊게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