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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들(오르한 파묵)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읽습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단어들이 설명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면서, 우리 독자들은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술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말하려고 한 것, 또는 말했다고 우리가 추측하는 것을 추적해 나갑니다. 


3

우리는 작가가 설명한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 합니다. 소설 읽기란 가장 깊이 빠졌을 때조차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어디까지가 경험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서로 모순되는 한 가지 이상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


4

우리는 계속해서 궁금해 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것일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삶을 통해 아는 현실과 같은 것일까?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적절한 형태를 부여한다면,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이러한 낙관주의 아래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합니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는 소설의 심장부에 있지 않고, 심장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6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다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매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7

우리 머릿속에서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특히 문학성 높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텍스트와 맺은 밀접한 관계는 우리 독자들에게 마치 사적인 성공처럼 다가옵니다. 소설이 오로지 우리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느낌, 이 달콤한 착각이 마음속에서 서서히 솟아오릅니다.


8

우리 기억도 한편으로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 준 세계에서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그러려면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을, 마치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설은 읽는 사람이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풍경 속으로 우리가 걸어갈 때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이전에 마주쳤던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9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면서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의 죄책감과 피해망상과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어떤 심오함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잇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 

『소설과 소설가』(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를 꺼내 다시 읽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한 연속 강연을 모은 글인데, 

간결하고 깔끔하게 오르한 파묵의 소설론을 정리해 두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우리가 소설을 왜 읽고, 어떻게 읽는지를 강렬한 언어로 기록한다.

소설 독서 심리학이라고 할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

그러려면 작품의 세부에 집중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