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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4> 감상 내용·장소·뒤풀이자리까지 빼곡… 조선 선비 詩會 기록 보는 듯 (부천 언니북)



초록색 표지가 아주 산뜻하다. 흰 글씨로 위쪽에는 ‘언니북’이라는 제목이 달렸고, 아래에는 영문으로 ‘only book’이라고 적혔다. 우리말로 읽으면 상냥하고, 영문으로 읽으면 뜻이 선명하다. 언니들의 책 모임, 오로지 책이라는 뜻이다. 100회 모임을 기념해 만들고, 서로 나누어 가진 토론 기록집이다. 기록은 치밀하고 철저하다. 날짜, 장소, 참석자, 토론 내용은 당연하고, 같이 모여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과 모임 후 뒤풀이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 마치 조선 선비들의 시회(詩會) 기록을 보는 듯하다.



6명 언니들의 오로지 책 모임

첫 모임이 있었던 날을 살펴보자.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저녁이다. “첫날 시작은 네 명”이라고 적혀 있다. 직장 근처 한식집 메이필드에서 먼저 네 사람이 모였다. 각자 한 권씩 읽은 책을 들고 와서 소감을 가볍게 이야기했다. 이용규의 ‘내려놓음’(규장), 샘 고슬링의 ‘스눕’(한국경제신문), 스베덴 보리의 ‘위대한 선물’(다산초당) 등이다.

부천 언니북이 100회 모임 기념으로 만든 기록집의 본문. 모임의 날짜, 장소, 참석자, 나눈 이야기, 뒷풀이 내용까지 손글씨로 써서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 다음 주 수요일인 7월 14일, 두 번째 모임이 있었다. 괄호에 “언니북 이름 지음”이라고 적힌 것을 보니, 이날 모여서 모임 이름을 정했다. 상동임금님이천쌀밥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현대백화점 커피숍으로 옮겨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빈 해리스의 ‘음식 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이레),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은행나무), 윌리암 캄콰바의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서해문집), 박용수의 ‘파리에서 음악을 만나다’(유비),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등의 책을 나누었다. 이날 독서모임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더 왔다. “all(6명)”이라고 적혔다. 이름과 멤버가 가득 찼으니, 드디어 모임이 완전해졌다.

그러고는 한 집안 여섯 자매처럼 똘똘 뭉쳐서 오늘까지 두 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함께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책은 모두 600여 권에 이른다. 주제 도서를 따로 정하지 않고, 각자 읽은 책을 들고 와서 한 사람이 10여 분 정도 내용을 소개하고 느낌을 섞어 이야기하는 독특한 진행 방식이 책의 이러한 풍요를 가져왔다.


낙 없는 일상 책으로 채우기

“우리 독서 모임이나 할까요?”

제 아무리 위대한 여정도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 한 자락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발령을 받고 각자 다른 학교로 흩어졌지만, 모임이 시작될 때에는 모두 수주고등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였다. 모임을 발의한 ‘언니’는 모임의 막내이자 회장인 최선미 선생이다.

“당시 학생과를 맡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낙이 없었어요. 지금 같이하는 두 분 언니가 같은 부서에서 일했는데, 덕분에 간신히 숨통이 트였어요. 취향이 비슷했거든요. 시를 읽고 감동 깊은 구절을 만나면 옮겨 적어 책상에 붙여 두거나 신문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같이 책을 읽자고 말을 붙여본 거예요.”

모임 장소는 부천롯데백화점 9층에 있는 쉼터다.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자 여섯 사람이 앉으면 꽉 들어차는 탁자 하나가 놓였다. 노란 기둥을 집 모양으로 둘러놓아서 동화 속 공간처럼 환상적이다. 언니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책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나이는 서른 중후반부터 스무 살 정도 차이나지만, 책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서로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름 뒤에 ‘언니’라는 호칭을 붙여서 부른다. 독고선 ‘언니’가 말한다.

“아주 기쁜 제안이었어요. 평소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뭐 이리 좋은 제안을 하나 싶었죠. 오히려 안 끼워 줄까 봐 걱정이어서, 바로 쫙 달라붙었습니다.”

맑고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쫙 달라붙는다’는 걸쭉한 표현이 귀에 쏙 들어온다. 현대인은 누구나 가벼운 우울을 앓는다. 반복되는 일상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안도현 시집의 제목처럼 모두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마음을 툭 열고 이야기할 사람이 그립다. 책을 읽고 이를 디딤돌 삼아 수다를 푸는 것은 최고급 치료제에 해당한다. 송해남 ‘언니’가 말을 잇는다.

“처음에는 서울 대학로에 같이 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또 방학 때는 모여서 ‘독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밤새워 책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을 얹어 말하다 보면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들이 스르르 풀려나는 기분이 듭니다. 모임을 하고 나면 심리치료라도 받은 것 같아요.”

언니북을 슬쩍 열어본다. 과연 네 번째 모임은 서울로 같이 떠났다. 성신여대 아시아프 미술전, 부원냉면, 일본 영화 ‘생존의 기록’, 남대문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워크숍을 겸한 ‘독서 여행’을 처음 떠난 것은 다음 해 1월 24일 월요일이다. 대천 대전학생해양수련원 44호에서 묵었다. 이 모임은 언니들한테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 같다. 금세 이야기가 흥건해진다. 청소년 시절 ‘밤새워 책 읽기’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또래들과 책을 나눈 후 평생 독서를 잊지 않듯이,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책을 읽으면서 같이 인생을 나누었던 체험은 모임의 뿌리를 아주 튼실하게 해 주었다.


따로 읽고 같이 이야기하기

그런데 모임에서 책을 나누는 방식이 특이하다. 다른 독서 모임처럼, 모두 같은 책을 읽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취향에 따라 각자 책을 읽고 와서 내용을 요약하고 감상을 발표한다. ‘말로 하는 서평’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된다. 서평의 중심에는 ‘인생’이 있다. 주로 책 내용이 자기 삶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책이 주는 지혜를 살아가는 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고백하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어찌 보면 책으로 하는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성순 ‘언니’가 말한다.

“책 하나를 정해 읽고 토론해 보기도 했고, 돌아가면서 소리 내 읽는 음독도 해 봤습니다. 하지만 나하고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책과 인간은 상성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바가 있어야 읽기도, 말하기도 좋았어요. 그래서 책은 따로 읽고 이야기만 함께 하기로 했죠.”

듣다 보면 다른 언니가 읽은 책이 탐나서 다음에 읽어 오기도 한다. 독서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고, 때때로 토론에 열이 오른다. 강신주의 ‘감정수업’(민음사),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푸른숲), 박경철의 ‘문명의 배꼽, 그리스’(리더스북) 등이 열띤 대화의 촉매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극히 드물다. ‘언니북’의 오랜 경험은 책을 ‘따로 또 같이’ 읽는 새로운 방식을 확인했다. 장은미 ‘언니’가 말한다.

“토론을 하지 않고 즐겁게 읽는 게 좋았어요. 모임에 올 때마다 책을 다섯 배로 읽고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 하지 않고, 들으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연습하고 다양성을 확인하는 겁니다. 게다가 저희는 전공까지 달라서 다른 ‘언니들’ 책의 배경 지식을 제공하는 등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교사가 책 좋아해야 학생도 읽어

‘언니들’은 모두 교사다. 입시에 쫓겨 책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의 초조함은 책 읽는 아이에 대한 의도적 왕따와 심각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른바 ‘책따’ 현상은 아이들이 자기 삶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의 표시이자 어른한테 보내는 진지한 구조신호다. 안창순 ‘언니’가 말한다.

“교사 독서모임이 정말 중요하죠. 교사가 책을 좋아해야 아이들도 책을 좋아합니다. 저희들 중에는 아이들 가방에서 책이 나오면 점수를 더 주는 ‘언니’도 있습니다. 어떤 책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맨스 소설이나 만화도 상관없어요. 무슨 책이든 일단 읽는 게 우선입니다.”

책을 함께 읽으면서 학생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심지어 수업 중에 몰래 책을 읽는 아이들을 모르는 체 내버려두기도 한다. ‘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서해문집)를 읽고 이야기한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집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모임을 꾸려서 이끌고 있다. 최선미 ‘언니’의 몸이 이야기 도중에 빛을 뿜는다. 주변 공기가 몰리면서 온도가 확 올라간다.

“이지성 작가의 팬이에요. ‘독서천재가 된 홍 대리’(다산라이프)를 읽고 독고선 언니가 치열하게 책 읽는 법을 배웠다고 했는데, 저 역시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이 작가가 책에서 쓴 대로 하루에 한 권씩 책 읽기를 실천하기도 했죠. 독서는 삶에 기쁨을 줍니다. 그 기쁨을 가르치는 아이들한테도 전하려 애쓰는 중이죠.”

언니북의 여섯 언니들. 따로 또 같이 책을 읽어 온 교사들로, '온리 북'(only book·오로지 책), 그래서 '언니북'이다.

언니북은 아직 신입회원을 받지 않는다. 모임의 외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모임의 질이라는 생각에서다. 대신 ‘언니들’이 다른 곳에 가지를 쳐 나가면서 가족 독서모임 등 또 다른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 마치 대나무처럼 땅속줄기를 뻗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순을 내는 중이다. 비라도 한 차례 내리면 쑥쑥 자라나서 이 소도시 전체를 덮어버릴 것이다. 창 바깥으로 어둠이 완연하다. 기나긴 여름해도 어느새 숨었다. 함께 책을 읽으니 좋으냐고 마지막으로 묻자 ‘언니들’ 목소리가 기쁨으로 여기저기에서 출렁댄다. 송해남 ‘언니’의 말이 솔직해서 아직도 마음을 건드린다.

“나이 들면 자부심이 떨어집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없어지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감쪽같이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자꾸 하고 싶은 일이 생겨나고, 머리와 행동의 간격이 조금 좁혀졌습니다. 게다가 함께 읽으면 더 많이 읽습니다. 좋은 일만 있지요.”


◆언니북이 고른 독서 초보를 위한 책

혼자서 또는 함께 모여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이지성의 ‘독서 천재가 된 홍 대리’(다산라이프, 2011)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독서의 이유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책으로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으나, 소설 형식의 책이라 일단 재미가 있어서 독서 초보자도 흥미를 끝까지 유지하며 완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