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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8> 패랭이꽃 버스에서 틔운 꿈, 그림책 도시 향해 달려요(원주 ‘그림책 연구회’)

패랭이꽃 버스에서 틔운 꿈, 그림책 도시 향해 달려요

원주 ‘그림책 연구회’



자녀들에 훌륭한 책 읽히려고

박경리 선생 사랑방에서 첫 발

읽기 모임 10년 만에 전국에 확산

“어른들도 즐기는 도서관 꾸미자”

전국에서 일흔다섯 명 의기투합

사회적 기업 그림책도시 프로젝트


원주 그림책 연구회 모임 장면


“어른들이 보기에는 어렵지만,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는데, 깔깔거리며 어느새 한계를 넘어서는 거예요.”

모임 장소로 들어서니 이미 토론에 힘이 붙었다. 원주시 단계동 주공아파트, 지은 지 서른 해가 넘은 전통 있는 아파트다. 건물은 다소 낡았지만 숲을 이룰 정도로 풍성한 나무들이 주변을 감싸서 아늑하고 시원했다. ‘그림책 도시’라는 로고가 붙은 현관 문턱을 넘어서자 다른 책 하나 없이 오직 어린이그림책만 방방마다 빼곡하게 꽂혀 있다. 앨리스나 도로시가 금세 말을 건네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선 것만 같다.

“이 그림은 터치를 보니까 붓을 떼지 않고 한 번에 그렸네요. 그림책에서 어떤 대상을 표현할 때 나누어 조금씩 그리는 것보다 이렇게 한 차례 휘둘러서 그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들었어요.”

돌아가면서 어린이그림책을 하나 들더니 일단 자분자분 소리 내 읽는다. 마치 아이들한테 읽어주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그림 하나하나를 세부까지 파고들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옮겨가면서 말하는 솜씨들이 매끄럽다. 

엄마들이 모여 어린이그림책을 읽는 모임은 전국적으로 꽤 흔하다. 어쩌면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수도 있다. 좋은 책을 추천받으려고, 실감나게 책을 읽어주려고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무렵이면 다투듯 책모임으로 들어선다. 그러고는 아이가 커감에 따라 거의 대부분 모임도 같이 졸업해 버린다. 자신을 위한 읽기가 아니라 아이를 위한 읽기이기에 아이의 나이테에 따라 명멸하는 것이다.


박경리 선생 사랑방에서 출범


2004년 여름,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선생의 사랑방에 열다섯 사람이 어린이그림책을 들고 모여들었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별다른 말은 건네지 않았지만, 공간을 내준 것으로 흡족함을 보였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이상희 씨의 ‘그림책 교실’을 수료한 학생들이었다. 그전 한 해 동안 이어졌던 공부가 너무 좋아서 흩어지지 말고 계속 어린이그림책을 읽고 연구하기로 했다. 벌써 열한 해째, 매주 월요일 모이는 ‘그림책 연구회’의 출발이었다. 엄은희 씨가 운을 뗀다.

“모임에 처음 왔을 때 아이가 다섯 살이었어요.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먹이듯, 훌륭한 책을 읽히려고 관심을 두었죠. 그러다 보니 더 많이 공부하려는 마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모임을 주로 한 곳은 ‘박경리 문학공원’ 안에 있던 작은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버스’에서였다. 폐차할 예정이었던 낡은 버스를 새로 꾸며 만든 도서관으로 이상희 씨가 출판사 등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설했다. 자원활동가로서 이 작고 특이하고 아름다웠던 어린이그림책 전문도서관을 무려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연구회 회원들은 우애가 깊어지고 친목이 넓어졌다. 간사인 최성미 씨가 말갛게 웃으면서 말한다.

“모임 회원은 1년에 한 차례 모집합니다. 자격은 저희가 모두 거쳐 온 1년 과정의 그림책 교실 수료자여야 합니다. 그림책 교실은 여섯 달 동안은 이론을 수업하고, 여섯 달 동안은 그림책을 창작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모두 어린이그림책 독자이자 작가이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작품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읽기를 통해 생각을 깊게 하고, 쓰기를 통해 읽기를 촉발한다. 쓰지 않고 읽을 수 있지만, 읽지 않고 쓸 수는 없으니까, 모든 사람을 작가로 만드는 일은 읽기를 확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말로 독서를 촉진하고 싶다면 ‘저자 특강’보다 ‘글쓰기 교실’을 여는 쪽이 아마도 더 효과적일 것이다. 시민을 위한 출판 교실을 운영하는 한 선배가 모임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시민들이 책 한 권을 쓰는 동안 참고 도서로 예순 권 가까이 다른 책을 읽는다고. 하기야 작가들은 대부분 타고난 독서가들이기도 하다. 작품을 쉬는 동안, 작품을 쓰는 동안, 그러니까 언제나 그들은 문자 중독자로 살아가면서 읽고 또 읽는다.


박경리문학공원에서 오랫동안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패래이꽃 그림책버스


어린이 마음 읽다보면 어른도 감동


‘패랭이꽃 그림책버스’는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공원 한쪽에 책을 가득 담은 노란색 버스가 놓인 그 10년 동안, 어린이그림책 읽기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어린이를 넘어서 어른까지도 기꺼이 즐기는 문화유전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혁명은 이렇듯 벼락처럼 다가온다. 한 사람이 품은 열망과 그가 내딛은 한 걸음이 이어질 수 있도록 주변 여럿이 힘을 보태어 이룩한 좋은 반복, 이것이야말로 문화혁명의 유일한 실체다. 허상인 씨가 말한다.

“저는 미혼입니다. 하지만 어린이그림책을 우연히 접하고는 그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어린이를 위해 만들지만 어른도 감동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마음이 가득 차 있어서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낍니다. 일단 이 세계로 들어오면 아무도 나가고 싶지 않을 거예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는 일찍이 어린이만 즐길 수 있는 어린이책은 어떠한 경우에도 좋은 어린이책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책은 항상 남녀노소를 뛰어넘고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면서 읽는 사람을 느껴 움직이도록 만든다. 어린이그림책이라고 전혀 예외일 리 없다.

패랭이꽃 그림책버스가 사라질 때, 전국에서 일흔다섯 사람이 모여들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회적 기업 ‘그림책도시’를 만들었다. 그 이름에는 원주를 어린이그림책 도시로 만들려는 커다란 꿈이 담겨 있다. 전 세계의 모든 어린이그림책을 모은 도서관이 있고, 그 주변에 대학, 숙소, 공원, 마을 등을 꾸며 어린이그림책 세상을 만들고, 해마다 어린이그림책 전시회를 겸한 축제가 열리는, 그야말로 그림 같은 도시. ‘그림책도시’는 그 꿈을 이룩하려고 내디딘 첫걸음이다. 현재 지역 역사인물을 하나씩 그림책으로 출판하고, 그림책 교실과 아트북 교실 등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함께할 시민을 모으는 중이다. 김경은 씨가 화제를 되돌린다.

“어른들이 읽으면 그림책은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위로를 줍니다. 기본으로 내가 좋아서 읽지만, 같이 읽으면 다른 사람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각자 소개할 책을 들고 오니까, 내가 미처 몰랐던 멋진 그림책이 참 많구나 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책 하나 들고 모임에 일단 참석한 후 천천히 함께 읽으면 되니까요.”

이야기하다 갑자기 자리를 비우더니 서가에서 그림책 하나를 꺼내 온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누구나 아는 사실을 하나씩 아름답게 표현해 가다가 마지막에는 아이들한테 자신의 유일무이한 소중함을 자연스레 깨닫게 하는 시 그림책 『중요한 사실』을 읽는 목소리가 참으로 낭랑하다. 

“너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너는 바로 너라는 거야. 예전에 너는 아기였고,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어린이고, 앞으로 더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건 틀림없어. 하지만 너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너는 바로 너라는 거야.”


그림책 읽기 도시로 확산하는 꿈


같이 모여서 작품 하나를 파헤치면서 열렬히 토론하면서 비판적 지성의 힘을 기르는 것도 좋지만, 일상의 목소리로 읽으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즐기고 이야기하는 것도 행복해 보여서 또한 정말 좋다. 차분히 글자를 더듬는 소리가 때때로 높아졌다 때때로 낮아지면서 방 안을 가득 울린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니 꽃에게, 비에게, 바람에게, 풀에게, 눈에게, 신발에게 자기 자리를 잡아주는 작가의 지극한 마음이 따스하게 와 닿는다. 마음의 소리굽쇠가 공명하면서 계속 소리를 낸다. 서진아 씨가 말을 잇는다.

“발음만 정확히 해서 지금 읽은 것처럼 읽어야 해요. 그림책은 작은 미술관입니다. 저도 예전에 동화구연을 배워서 자격증을 땄습니다. 하지만 구연을 하면 아이는 책을 보지 않고 구연하는 사람의 입을 봅니다. 그림이나 글에 전혀 집중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림에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서 아이들 상상력을 무진장 자극합니다. 어른도 보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은 그림의 세부들로부터 찾아내곤 합니다. 누구나 그 비슷한 일로 깜짝 놀란 경험이 있을 거예요.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의 잠재력이 일어서는 걸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그림책은 그 자체로 종합예술이다. 시가 있고, 소리가 있고, 그림이 있고, 연극이 있다. 아이들은 대부분 읽기를 통해 재능을 발견한다. 사교육을 하지 않아도 문학도 하고 미술도 하고 연극도 한다. 재능의 꽃이 필 때 가꿈은 거의 필요 없다. 타고난 공감유전자가 아이를 저절로 예술가로 만든다. 불필요한 학원비 탓에 안달하느니 가까운 서점을 찾는 게 당연히 낫다. 최성미 씨가 힘주어 이야기한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면 아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저를 이해합니다. 공감은 연습을 통해서라도 몸에 반드시 붙여야 할 습관입니다. 같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게 가장 빠릅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아이들 어휘력이 늘어나다 어느 순간 언덕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겁니다.”

미국 소아과학회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책을 많이 읽어주면 아이의 좌뇌 쪽에서 “청각, 시각을 비롯한 여러 자극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종합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하는” 부위가 눈에 띄게 발달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화책을 들고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서 같이 읽다가 어느새 잠들었던 사랑의 기억이다. 이 기억이야말로 아마도 평생 사람답게 살아가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읽기 모임 ‘그림책 연구회’가 사회적 기업 ‘그림책 도시’로 도약한 것은 그 원천을 한 도시 전체로 퍼뜨려 사랑의 세상을 만들려 함이 아닐까.



 ◆ 그림책연구회 사람들이 뽑은 우리나라 그림책


그림책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부모들한테 김장성 글․오현경 그림, 『민들레는 민들레』(이야기꽃, 2014)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연필과 수채화로 그린 그림은 담백해 정감 넘치고, “민들레는 민들레/ 여기서도 민들레/ 저기서도 민들레”가 거듭되며 생기는 율동감 있는 말맛 또한 기막히다. 문장의 시적 압축미와 그림의 풍부한 단순성이 어울리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장성 글․오현경 그림, 『민들레는 민들레』(이야기꽃, 2014).

권정생 글․정승각 그림, 『오소리네 집 꽃밭』(길벗어린이, 1997).

이태준 글 ․ 김동성 그림, 『엄마 마중』(보림, 2013).

정하섭 글․한성옥 그림, 『나무는 알고 있지』(보림, 2007).

서현 글․그림, 『눈물바다』(사계절, 2009).

윤지회 글·그림, 『방긋 아기씨』(사계절, 2014).

김병하 글․그림, 『고라니 텃밭』(사계절, 2013).

윤석중 시․이영경 그림, 『넉 점 반』(창비, 2004).

백석 시․김세현 그림, 『준치가시』(창비, 2006).

천정철 시․이광익 그림, 『쨍아』(창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