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15쪽)
활자 유랑자 금정연 씨가 프레시안에 쓴 글 「김수영의 독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양아치!"」에서 마주친 구절. 나보코프는 감각의 천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영원한 거주자를 이토록 감각적 표현으로 보여 준 이는 많지 않다. 눈을 감고 가만히 굴려 본다. 내 마음속 그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서 한 자씩 튀겨 가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내 혀끝은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가? 문장은 체험과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된다. 멋진 구절이다.
![]() |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민음사 |
2
금정연 씨의 글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인 김수영의 [절망] 전문이 말미에 인용되어 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본래 내가 사랑하고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 구절은 이성복의 시에 나오는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리지 못하고"라는 구절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이 구절을 틈날 때마다 곱씹으면서 생각해 왔다. 발견하는 눈이 길어올린 생생한 언어 뒤에 현대적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감추는 방법을 찾는 것, 그로써 언어의 새롭힘이 한낱 유희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을 문학에 약동시키는 것, 또한 편집자로서는 그런 행위자를 옹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김수영의 [절망]은 이성복의 한 세대 위 선배가 다다른 사유의 끝없는 높이를 보여 준다. 우리 문학은 이 높이에서부터 더 높은 곳으로 얼마나 자라난 것일까. 언젠가 이런 높이를 가늠할 시간을 갖고 싶다.
![]() |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민음사 |
3
나는 나와 연계된 사회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사르트르, 『구토』
정진국의 『유럽의 책마을 산책』(생각의나무, 2008)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구절이 떠올라 버렸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다. 아마 못해도 2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걸 지금껏 기억할 리는 없고, 그사이 어딘가 다른 책에서 읽고 마음속에 밑줄을 그어 두었을 것이다. 이렇게 책에서 구절만 뚝 떨어져 머릿속에서 굴러다닐 때, 그것도 다른 책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를 때, 읽기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스위스 구석의 책마을에 대한 부분을 막 읽었던 참이었으니까 아마도 홍성에 있는 동생 생각이 난 것 같다. 시골 구석에서 '생태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동생을 돕는 일을 조금이나마 기획해 보고픈 마음이 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건 나한테 책마을 만들기라는 형태로 자라난 것 같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에서 만난 마을의 강렬한 이미지가 그 마음을 자극해 사르트르의 한 구절을 불러낸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 방식(그것은 아마도 디지로그가 아니라 아날로지털이어야 할 것이다.)으로 삶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나한테는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델, 친구들이 먼곳에서 불현듯 찾아와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삶의 형식을 정착해 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동생과 나를 연결하는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는 것, 수줍음 속에서도 고개를 디밀면서 눈을 살짝 든 채 앞으로 움직여 보는 것이 늘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동생과 함께 꾸미는 책의 공동체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문득 적는다.
![]() | 구토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
![]() |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정진국 지음/생각의나무 |
![]() | 아리랑 님 웨일즈. 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동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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