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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6일( 토)



1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15쪽)


활자 유랑자 금정연 씨가 프레시안에 쓴 글 「김수영의 독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양아치!"」에서 마주친 구절. 나보코프는 감각의 천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영원한 거주자를 이토록 감각적 표현으로 보여 준 이는 많지 않다. 눈을 감고 가만히 굴려 본다. 내 마음속 그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서 한 자씩 튀겨 가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내 혀끝은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가? 문장은 체험과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된다. 멋진 구절이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민음사




2


금정연 씨의 글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인 김수영의 [절망] 전문이 말미에 인용되어 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본래 내가 사랑하고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 구절은 이성복의 시에 나오는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리지 못하고"라는 구절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이 구절을 틈날 때마다 곱씹으면서 생각해 왔다. 발견하는 눈이 길어올린 생생한 언어 뒤에 현대적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감추는 방법을 찾는 것, 그로써 언어의 새롭힘이 한낱 유희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어떤 힘을 문학에 약동시키는 것, 또한 편집자로서는 그런 행위자를 옹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김수영의 [절망]은 이성복의 한 세대 위 선배가 다다른 사유의 끝없는 높이를 보여 준다. 우리 문학은 이 높이에서부터 더 높은 곳으로 얼마나 자라난 것일까. 언젠가 이런 높이를 가늠할 시간을 갖고 싶다.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민음사



3


나는 나와 연계된 사회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사르트르, 『구토』


정진국의 『유럽의 책마을 산책』(생각의나무, 2008)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구절이 떠올라 버렸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다. 아마 못해도 2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걸 지금껏 기억할 리는 없고, 그사이 어딘가 다른 책에서 읽고 마음속에 밑줄을 그어 두었을 것이다. 이렇게 책에서 구절만 뚝 떨어져 머릿속에서 굴러다닐 때, 그것도 다른 책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를 때, 읽기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스위스 구석의 책마을에 대한 부분을 막 읽었던 참이었으니까 아마도 홍성에 있는 동생 생각이 난 것 같다. 시골 구석에서 '생태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동생을 돕는 일을 조금이나마 기획해 보고픈 마음이 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건 나한테 책마을 만들기라는 형태로 자라난 것 같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에서 만난 마을의 강렬한 이미지가 그 마음을 자극해 사르트르의 한 구절을 불러낸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 방식(그것은 아마도 디지로그가 아니라 아날로지털이어야 할 것이다.)으로 삶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나한테는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델, 친구들이 먼곳에서 불현듯 찾아와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삶의 형식을 정착해 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동생과 나를 연결하는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는 것, 수줍음 속에서도 고개를 디밀면서 눈을 살짝 든 채 앞으로 움직여 보는 것이 늘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동생과 함께 꾸미는 책의 공동체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문득 적는다.


구토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정진국 지음/생각의나무



4

《불교타임스》 문화면을 RSS로 구독해 읽는데, 키스도 못하고 죽은 승려 출신 혁명가라는 기사에서 재미있는 구절과 마주쳤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서 인용한 말이었다. 금강산 절에서 내려온 승려 두 사람이 중국으로 건너가 공산주의 혁명 운동을 하다가 광동 코뮌 사건 때 죽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장지락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은 1927년 광동에서 죽었다. 한 명은 중상을 당해, “내 나이 이제 스물여덟이다. 아직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 아가씨와 키스 한번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구 한명이 자기 부인을 불러 죽기 전에 키스를 시키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나머지 한 사람도, 나이 겨우 서른에 광동코뮨 때 기총사격을 받아 다른 조선인 16명과 함께 죽었다. 이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는 활동적인 승려였다.

대학 시절 『아리랑』을 읽었을 때, 격변의 순간마다 헌신하다 사라져 간 혁명가들 이야기에 가슴 뭉클한 적이 많았지만 이 구절을 읽은 기억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한 혁명적 인간이 최후에 마주친 인간적 충동이 "아가씨와의 키스"라니? 이 충동, 이 에로스적 순간은 그의 무의식 어디쯤에 감추어져 있었을까? 승려이기에 아가씨를 만날 틈이 없었을 것이고, 혁명가이기에 연애질에 한눈 팔 시간이 없었던 것일까? 광동에 난만하게 넘쳐흐르던 신연애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슴 한켠에 선연한 이미지를 키워 갔을 그의 불우에 경의를 표한다. 
하나 더 눈길을 끈 것은 사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내를 부르러 갔던 동지의 윤리이다. 이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공부가 부족해 잘 알 수 없지만, 이 공간에서는 적어도 부부 관계가 독점과 정절을 기본으로 하지 않았던 것일까? 코뮌적 윤리가 여기까지 영향을 준 것일까? 물음은 많지만 답을 얻기에는 부족하다. 이영아 선생과 연락이 닿으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아리랑
  
님 웨일즈. 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동녘



5

미술평론가 박진아 씨의 글 「새 반스 컬렉션 미술관 개관에 즈음하여」를 읽다가 미국의 노동자 철학자 에릭 호퍼를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로 살면서 가끔씩 철학 논문을 썼던 이 사람은 한 사람이 어떻게 고유한 자기 색깔을 벗어던지고 집단적 광기의 추종자가 되는지를 파헤쳤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쉽다.

호퍼에 따르면, 집단 광기를 따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좌절한 사람, 즉 실패한 사람이다. 현재의 자기 모습에 절망한 사람들은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나면 자신을 초월해 작동하는 것 같은 저 바깥의, 마치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초월적이고 숭고한 가치에 사로잡히기 쉽다. 때마침 이러한 가치를 겉으로 내세우는 집단 운동을 접하게 되면, 자신을 그 운동과 깊게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고장난 인생으로부터 열의를 다해 도피한다. 자신을 상실했기에 그는 열정을 다해 타자들을 공격하고, 마침내 자신마저 파멸시키기에 이른다. 박진아 씨가 인용한 부분은 그러한 호퍼의 통찰을 집약하고 있다. 요즘 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갑자기 호퍼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연히 읽은 글에서 그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기록해 둔다.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는 사람 중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인류 전체를 사랑하지 않는 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대의와 명분이 일상에 매개되지 않고도 운동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일찌감치 끝이 났다. 밤에는 유령도 때때로 거대한 힘을 쓸 수 있는 법이지만, 새벽 첫 빛이 떠오르면 결국 이슬처럼 스러지는 법이다.

맹신자들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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