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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밑줄과 반응 2012년 6월 2일(토)


1


때때로 그런 방식으로 팔아먹고는 있지만 소셜 미디어 버튼들은 소셜 미디어 전략이 아니다. 월등하게 좋은 콘텐트, 진지한 네트워킹, 지속적인 인간적 참여가 바로 당신이 [소셜 미디어에서] 프로필을 만들어 가는 방법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정보디자이너 올리버 레이첸스타인의 말이다. 소셜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흔히 좋아요나 리트윗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견고한 사회적 관계가 구축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자신의 내실을 키우고 진지하게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 사람 책을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날카로운 통찰이다.



2


당신 인생을 위한 비전을 품을 필요가 있다. 인생을 위한 어떤 계획을 알 수 없을지라도 당신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해야만 한다. 당신은 자기 인생의 운전석에 앉으려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당신을 운전해 버릴 것이다. 

- 오프라 윈프리 


이런 화법들은 자기 계발서에 흔하게 나타난다. 특히 마지막 두 문장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 냉소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이상한 심사다. 냉소하면서 사랑하다니.



3


인생도 한 권씩 한 권씩 불온서적 독파 목록을 쌓아가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어느쪽이냐 하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다른 어떤 매체와도 달리 활자로 된 책이야말로 진정한 각성의 기회를 주는 유일한 매체이며, 독서행위 자체에는 이미 어떤 책의 불온함이나 사악함을 넘어서는 힘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하종오 선배가 쓴 칼럼 「금서의 추억」에서 밑줄 친 말이다. 국방부 불온 서적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을 계기로 쓴 칼럼이다.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한 하 선배의 문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좋은 칼럼이었다. “책이야말로 진정한 각성의 기회를 주는 유일한 매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터넷 등에서 정보 조각들을 읽는 것으로 책 읽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선사의 화두와 같이 번뜩이는 말 한마디도 가끔 그럴 수 있지만, 내러티브 형태로 조직된 책의 사유만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 스며드는 힘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삶과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체험한다. 독서행위 자체에 책의 불온함이나 사악함을 넘어서는 힘이 있는 것은 읽기를 통해 글쓴이의 삶과 읽는이의 삶이 내면에서 격렬히 반응하면서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책의 힘을 믿는 사람이 아직 곳곳에 있다. 이 세대 이후에 책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4

일상에서 얻는 예술적 요소, 경험, 수치를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혁신이며, 이런 과정은 일종의 예술이다. 

새로운 멋진 것을 만들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인위적인 틀에서 벗어나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있는 회색 영역인 그레이 스케일 세상에 살아야 한다.
― 스티브 워즈니악

철학적 기술자 워즈니악이 없었다면 철학적 마케터 스티브 잡스는 자기 재능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5월 23일 스티브 워즈니악이 방한해 대전에서 열린 이노비즈 글로벌 포럼에서 ‘기술 환경에서 창의성과 혁신을 촉진하는 방법’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한국일보》에 실린 김명곤 칼럼 「‘괴짜 천재’의 경고」에서 메모한 말이다. 워즈니악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혁신을 발상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삶의 태도 문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인위적인 틀을 거부하는 것, 이도 저도 아닌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일상이 가끔씩 뿜어내는 예술적 충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그러한 경험을 반추하며 기존 수치를 재점검해 보는 기나긴 노동 과정이 바로 혁신 그 자체이며, 그 과정은 예술 창조의 과정에 비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책을 혁신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주는 일도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집요하게 읽고 생각하고 만드는 과정의 반복만이 비독서 시대에 책을 구원할 것이다.


5

첫 발자국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다음은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우리가 직접 하자고 결심하는 것이다. ― 루이스 웨이스브루커(1826 ~1909)

실라 로보섬의 『그녀들의 외출』(삼천리, 2012)에 나오는 말로  《한국일보》 서평을 읽다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려고 밑줄 쳐 두었다. 자기계발 과잉의 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이들을 또 괴롭힐까 두렵지만, 배경 스토리와 함께 해 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요즘 아이들은 ‘~ 할 수 있다’를 너무 많이 듣고 자라는 게 아닐까. 그래서 힘을 주는 어떤 말도 이미 냉소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한없이 이런 말을 듣고 위로받고 힘을 내고 싶어 한다. 할 수 없음과 할 수 있음 사이의 처참한 긴장이 아이들 영혼을 찢어놓고 있다. 어떻게 이 말을 아이에게 할까? 갑자기 그런 고민이 들었다.


6

부자의 세금을 올리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신화에 불과한 주장이다. 1980년 이래 미국 부유층의 소득은 3배 이상 늘었지만, 같은 기간 세금은 50% 수준으로 줄었다. 앞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일자리의 ‘홍수’라도 났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는 소비자와 중산층이 만든다. 부유층 중과세를 통해 얻은 조세수입을 중산층을 성장시킬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중산층과 빈민은 물론 부유층에도 보탬이 되는 최선의 정책이다. ― 닉 해나워

미국의 벤처투자자로 아마존닷컴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거머쥔 닉 해나워의 테드 강연을 요약한 《한겨레 21》기사다. 미국이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월스트리트의 타락한 자본가들 때문이 아니라 이런 건전한 자본가들 때문이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아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 우리가 가장 알아야 할 지식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한된 자원을 핵심에 집중해 투자하는 것, 이런 능력이 우리 사회에도 필요할 것이다. 분명 재벌이 한국 사회에 기여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대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고용이나 행복과 거의 아무 관계도 없어졌다. 지금은 그들에게서 혜택을 거둬 들여 그 돈으로 중산층을 성장시킬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이 말은 어쩐지 우리를 향해  해 주는 말처럼 들렸다.


7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신체성을 부여하는 지속적인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인간의 고통, 다시 시작되는 인간의 항거, 가차 없이 재개되는 투쟁을. (들뢰즈)

《한겨레》에 실린 오길영의 칼럼 「‘돈의 맛’과 한국문학」에서 재인용한 글이다. 오길영의 칼럼은 현실과의 접속 지점을 상실해 버린, 그리하여 현재도 과거도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문학, 정확히 말하면 한국 소설의 현재를 날카롭게 공격한다. 어떤 고통들, 영원히 회귀하는 감각들, 결코 잊히지 않도록 언어의 심층에 기록되는, 그리하여 누를 때마다 핏물처럼 배어 나오는 그 감각의 폭주들을 만나고 싶다.


8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목적론적이기 보다는 종말론적이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꿀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시간은 말 그대로 거꾸로 흐른다. 현재의 사건이 과거로 흘러 과거를 바꾸어 내기도 한다. 가령 아버지의 유령이 도래한 순간, 햄릿은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복수라는 미래의 책임을 떠맡는다. 즉 어긋나 있는 시간의 이음매 사이로 일종의 메시아적인 것의 출현한 순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시간은 종말을 고한다. (최진호)

수유너머 웹진에 실린 최진호의 「데리다와 메시아적인 것」에서 따온 말이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인용된 『햄릿』의 한 구절,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의 시간이 단절되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 혁명이라면, 혁명의 시간은 그때까지의 시간을 파멸시키고 전적으로 새로운 시간을 생성한다. 허리가 꺾인 막대기 같은 시간, 그러한 시간들이 조각난 채 아슬아슬하게 겹쳐진 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재밌는 글이었다. 다음과 같은 부분은 정말 멋진 통찰이다.

혁명은 아주 작은 것이기도 하고 아주 큰 것이기도 하다. 혁명의 크기의 차이가 있을망정 혁명의 강도는 동일하다.


9

이것[데리다의 메시아적 혁명 개념]은 어떤 목적을 재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현재의 과정을 중단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매순간 불가능성으로 다가오고, 매순간 기존 과정을 중단시키고, 매순간 새로운 배움을 환기하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될,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 용인된다면 ‘혁명을 혁명하는 혁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유령은 불가능성이므로, 과정조차 변혁시키고서야 나타난다. 혁명의 과정 그 자체가 혁명의 대상이 된다. (강민혁)

수유너머 웹진에 실린 강민혁의 「타자, 유령, 혁명」에 나오는 글이다. 근본적(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혁명. 중단으로서의 혁명, 점거로서의 혁명, 재설정으로서의 혁명 등 이름을 어떻게 붙이더라도 일체의 지배도, 선언도, 존재도, 멈추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끝없는 생성으로서의 혁명, 그러니까 영원 회귀로서의 혁명. 대학 때 데리다 책을 읽으면서 그 난해함에 좌절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조금 쉬워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