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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2> 전주 북세통 "더불어 읽고 놀며 느끼며…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고 싶었죠"


"더불어 읽고 놀며 느끼며…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고 싶었죠"

[책, 공동체를 꿈꾸다] <2> 전주 북세통



스무 살, 세 남녀 13년 전 모여 대학 과제물 작성 고민하다

"생각 기르려면 꾸준히 독서해야" '교회 오빠' 말 믿고 첫 모임

한 해 4~6권 인문사회과학 교양서…사회공동체 속 유기적 인간 고민



전주 평화동 북세통 회원들이 오랜만에 진안으로 야외 책모임을 떠났다. 마실 모임으로는 책 읽고 술 한 잔이 가장 좋다는 젊은 모임이다. 생각하는 시민을 꿈꾼다.



스무 살, 세 남녀가 책을 들고 모였다. 막 대학교에 들어가 과제를 하라는데,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랐다. 불안하고 답답했다. 다니던 교회의 오빠(?)에게 상의했더니, 글을 잘 쓰려면 먼저 책부터 읽으라고 했다. 별로 책을 즐기지 않았지만, 혹여나 성적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순진하게도 일단 모여 본 것이다. 2003년 이래 열세 해 동안 전주 평화동 골목을 책으로 지켜 온 독서공동체 북세통(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다)이 탄생한 순간이다.

1주일에 한 번씩, 늘 모이던 평화동 던킨도너츠 가게를 떠나서 이번에는 전주 근처 진안군으로 여름 소풍을 떠났다. 스물 후반부터 마흔 후반에 이르기까지 입소문으로 조금씩 늘려온 멤버들이다. 초기에 같이했던 사람들 중엔 다른 지역에서 직업을 얻는 바람에 한 해에 두 번 있는 가족 동반 야유회에만 참석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독서공동체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일자리가 집중된 수도권에서 유랑민으로 살아가는 상황은 지방 독서 모임의 지속을 상당히 위태롭게 만든다.

여름 공기이지만 무덥지 않고 청량하다. 꽃의 숨결이 깃든 듯 달콤하고, 풀의 기운이 옮은 듯 시원하다. 창문을 열고 한동안 자동차를 달리면서 세속의 때를 씻어낸다. 어디에나 흔한 마을나무인 큼직한 느티나무를 지나치자 곧바로 목적지인 좌포교회다. 처음 책모임을 권한 ‘교회 오빠’ 한명재 목사가 목회하는 곳이다. 초기 삼인방 중 한 사람인 김영선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 생각을 기르려면 좋은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진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 모임을 하면서 읽은 책이 우리 멤버 중 한 사람의 기말시험에 과제로 나온 겁니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죠. 읽기가 생활에 진짜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그때부터 모임이 즐거워졌습니다.”


스무 살 세 청년의 순진한 시작


벌여놓은 포도 알이 달다. 점잔을 빼지 않는 솔직함이 참 좋다. 하기야 읽기란 본래 생활을 위한 것인데, 시험에라도 나와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책을 어디에다 써먹는다는 말인가. 처음엔 쑥스러워하더니 일단 말문을 트자 좌르륵 매끄럽다. 오랫동안 책과 더불어 수없이 논전을 치러온 사람답다.

“한 번에 몰아 읽기가 부담스러워서 네 차례 정도로 나누어 쪼개 읽습니다. 50쪽 정도입니다. 한 사람이 발제를 하고 나머지 사람이 듣고 주제를 정해 토론합니다. 안 읽어 와도 됩니다. 발제를 듣고 의견을 이야기해도 되니까요. 사실 책으로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뒤풀이에서 살아가는 일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공동체 맞나? 혹시 책을 빌미로 한 친목 모임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느낄 정도로 발언이 자유롭다. 모바일 시대에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면 이래야 할지도 모른다. 책의 무게에 눌려 있기보다는 책과 더불어 논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위기를 느낀 교회 오빠(?)가 슬쩍 끼어든다.

“함께 모여서 읽는 재미가 우선이지만, 책은 주로 인문사회과학 쪽의 교양서를 읽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고민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 관계를 만들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생각하는 시민’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한 해에 4~6권 정도 사회적 이슈와 연결된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시민이 되었나요, 하고 슬쩍 물어보자, 모두 일단 까르르 웃고 만다. 오랫동안 같이 책을 읽어 왔지만, 역시나 미혼이 많은 청춘이다. 모임 내에서 한 번도 썸(!)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뒤늦게 모임에 들어온 또 다른 진지한 오빠인 김기원씨가 말한다.

“모임에서 책을 읽기 전에는 뉴스가 나랑 관계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습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제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제 안에서 선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욕망을 좇아서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게’를 생각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모임에 위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매주 발제를 하는 게 부담스러웠고, 매번 만나서 밤이 이슥하도록 마실을 나가다 보니 관성에 지쳐서 반년 정도 쉬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한 동네 주민이니만큼 휴지기에도 밤 마실 모임은 가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친한 누군가와 한 골목을 공유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정녕 없을지도 모른다. 오다가다 마주치면서 나누는 인사 한마디로도 인생은 깊어진다. 어느 날 술 한잔하다가 “이러지 말고 책이라도 읽으면서 지내자”라는 말이 불쑥 나왔다. 모두 마음 속에서 그 시간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모임에 여유를 주려고 한 해 넉 달 방학이 생겼다. 그 대신 그때에는 가족까지 동반하여 문화답사를 떠나는 집중 친교 시간을 보낸다. 이주 등으로 지역을 떠난 멤버들에게도 미리 알려 이때만큼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역시 제사보다는 떡밥이 중요하다. 모임을 빌미로 밤새 놀아보자는 야유회 아닌가요, 하고 묻자 모두 말없이 입 꼬리만 올라간다.


친목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라

김영선씨가 말길을 다시 책으로 돌린다. “김산해 선생의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었을 때가 가장 기억나요. 절판되어 제본을 떠서 읽었는데 충격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성서를 읽으면서 자랐는데,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수메르 신화에도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붙었습니다. 이 책처럼 생각거리를 던져 주면서도 저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하지 않은 책일 때 같이 이야기 나누기 좋아요.”

좋은 책은 제목만으로도 상상의 샘을 자극한다. 책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이 책 저 책을 보태면서 말이 금세 풍성해진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어요.”

흔히 ‘연애의 방법’을 다룬 것으로 오해받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구절이다. 북세통에서도 마찬가지로 속아서 읽었지만 그 내용에 깊이 감동했다. 현실 탓에 사랑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살아가는 편이 편하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나. 물론 청춘은 사랑에 관심이 많다. 중년도 마찬가지다. 사랑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얼굴이 환해진다.

독서공동체의 가장 큰 고충은 사실 모임 장소다.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가게 주인은 없다. 한두 시간 죽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눈치가 따로 없어도 마음이 조금씩 초초해진다. 책을 구매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부담인데, 모임 비용까지 붙으면 고민이 커지게 마련이다. 한명재 목사가 말한다.

“책은 지역서점에서 일괄 구매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지역 인문학 서점에서 책도 구매하고 모임도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평화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모임이 점차 소원해지더군요. 그래서 다시 평화동에 있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 장소에 정착했습니다.”

지역서점과 독서공동체의 상생은 출판이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지역서점에 사람들이 모일 공간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독서공동체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거점들을 확보하는 것은 어쩌면 출판정책에서 가장 우선해서 고려할 만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한 모금 들이켠, 식은 커피가 유난히 썼다.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고 싶다”

맏언니인 한옥순 씨가 슬쩍 끼어든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멍청해지고 싶지 않아서 모임에 나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모임 도서를 읽고 있는데, 제 딸이 그러는 거예요. ‘엄마, 이런 책도 읽어요.’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어요. 그 후로 딸애는 무슨 일이 있을 때 제 의견에 꼭 귀 기울이더라고요.”

인간에게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굴욕 상황에 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한다. 책을 읽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 내면의 두께를 함부로 짐작할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이 곧 존중받을 중요한 이유가 된다. 막내이자 모임 간사인 김선미 씨가 덧붙인다.

“함께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 거잖아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책을 읽고 이야기하다 보니 대화의 질이 달라지더라고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후 공기가 따스하다. 바람에서 햇볕의 맛이 난다. 숨결이 닿을 듯 몸들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멤버들 목소리가 소리굽쇠처럼 서로를 울리는 깊은 공명이 일어난다. 각자의 성조로 부르지만 전체가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리는 합창곡 같다. 모임의 또 다른 막내 조아라 씨가 말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름대로 삶의 방향성을 잡고 가려고 애쓰게 되었어요. 살면서 마주치는 여러 선택의 순간들에 책에서 읽은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더욱이 모임에 나와서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 생각만 가지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경험을 통해서도 책을 읽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 생각도 조금씩 존중하게 되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고 싶다는 북세통의 바람은 최근 들어서 확산을 시작했다. 멤버들이 직장으로 들어가면서 오랜 경험을 살려서 직장 내에서 또 다른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스무 살 세 청춘이 시작한 독서공동체가 지역의 삶 속으로 파고들면서 변화의 씨앗을 파종하는 진지로까지 성숙한 것이다. 이는 지역에 뿌리 내린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이다. 느리게 조금씩 움직여도 충분하다. 인생은 길고, 살아갈 날은 아직 많다. 평생 이 지역에서 살아갈 터이니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다. 늦게 만들어진 그릇은 본래 크기가 크니까 말이다.


장은수·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