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職)/책 만드는 일

도서관, 서점, 그리고 출판을 생각하다


도서관이 미디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내게 도서관은 사람들의 기억이 쌓이고 모여서 전달되는 공간이 아니라 책들의 시체가 층층이 쌓여 있거나 창백한 얼굴의 학생들이 시험 공부에 몰두하는 거대하고 차가운 건물일 뿐이었다. 불행히도 편집 일을 하기 전에는 도서관에서 사서와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 위해 주고받는 말 외에 다른 대화를 한 기억이 전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인 포르투갈의 코임브라 대학 도서관


마찬가지로 서점이 미디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역시 어렵다. 점원들과 책과 세계에 대한 한마디 대화도 하기 어려운 한국의 서점은 더욱더 그렇다. 한국의 서점은 대부분 책이라는 상품을 돈과 교환하는 물신의 장소일 뿐이다. 오로지 매출을 위한 이전투구가 있을 뿐, 서점을 통해 인류가 기억할 만한 문화를 같이 만들고 확산한다는 공유의 원리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돈벌이에 지친 서점들은 점점 할인 놀이를 통한 자멸적 현금 확보와 광고의 휘황함 속에 썩어 가는 물신 숭배로 몰려갈 뿐 고급 문화의 전달자로서의 역할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의 엘 아테네오 서점.


독자들이 책과 만나는 대표적인 두 통로인 도서관과 서점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소외되어 있는 한 한국 출판에 별다른 희망은 없다. 책을 통해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들려는 저자들의 온갖 노력도, 그들을 도우려는 편집자들의 분투도 그저 공허할 뿐이다. 여기에 출판 자체마저 자본의 위협에 쫓겨 생존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허덕대면서 오직 환금성의 유혹에 시달린다면 조만간 한국 출판이 맞이할 결말이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제 파주에서 있었던 회사의 페밀리 세일에 다녀왔다. 1년에 이틀을 정해 민음북클럽 회원(유료 회원)에게 서점에서 반품된 도서들을 파는 행사로 올해로 두 해째 열린다. 반품 창고 통로를 빼곡히 채운 채 모두 십여 권 이상씩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괜히 뿌듯했다. 마케팅을 하는 후배 한 사람이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데, 평소 초판 1500부를 소화하려면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하면서 놀라워했다. 그러나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들조차 반품된 채 들어와 놓여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쓰라리다. 서점의 신간 수용 능력은 점차 떨어져서 이제 화제에 오르지 못하는 책은 불과 보름 만에 창고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내 손으로 잡아 일으켰으나 별로 큰 도움이 되지도 못한 채 쓰러진 책들을 보니 마음이 괜히 불편하다. 초임 편집자 시절, 반품된 책들이 폐지 공장에서 폐기되는 것을 보고 며칠 동안이나 가위 눌렸던 생각이 난다. 무작정 폐기할 수도 없으니, 이렇게 독자들을 불러들여 그나마 주인을 찾아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기획한 행사다. 예상을 뛰어넘는 폭발적 반응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계속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못 다한 글을 챙겨 읽고, 청탁받은 원고를 아주 조금 썼다. 펭귄랜덤하우스 출현 이후 출판계 동향에 관한 글들을 챙겨 읽으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다가 강예린, 이치훈 두 사람이 쓴 책 『도서관 산책자』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읽다가 곧 책상에 정좌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중했다.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에서 빌려와서 산책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내용상 순례자 쪽이 정확해 보였다. 도서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재치 넘치는 글솜씨가 버무려진 멋진 책이었다. 편집한 후배한테 부탁해서 저자들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즐거울 것 같다. 책 전체가 멋진 말들로 가득하지만 가장 앞쪽 밑줄 친 곳만 여기 표시해 둔다. 아, 어쩔 수 없나 보다. 좋은 필자가 있고 열정 넘치는 편집자가 있는 한 책은 계속될 것이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강예린과 이충호


매일 사람이 드나들면서 책을 읽는 공간은 박제되지 않는다...... 도서관은 삶의 마지막을 추모하기보다 삶이 계속되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도서관 산책자 
강예린.이치훈 지음/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