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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편집자의 책상(프레시안 기고문)



오늘날 한국 출판 문화에서 프레시안북스는 독특한 진지를 점하고 있다.

사실 보도와 중립적(?) 리뷰 중심의 언론들 사이에서 프레시안북스는 거의 유일하게 진지한 읽기를 기반으로 한 비판적 서평이 실리는 곳이다. 거기다 주말마다 포털 사이트의 첫 화면에서 눈을 더럽히는 온갖 낚시 기사들 사이에서 지적 자극으로써 사람들 눈길을 끌려고 안쓰럽게 몸부림쳐 주는 저자들과 편집자들과 독자들의 친구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온라인 기사들 중 일부를 한 달에 한 번씩 따로 모아서 독립출판사 알렙에서 펴내는 종이 서평지 Pressian Book Review가 있다. 지금 두 호밖에 나오지 않았고 기사도 온라인 기사들을 옮겨 온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 잡지가 서점 공간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기대하고 있다.

이 잡지 마지막 면에 「편집자의 책상」이라는 코너가 있다. 편집자의 책상에 놓인 책들을 소개하는 코너인데, 초대받아서 글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나를 편집자로 만든 책들, 내가 오랫동안 끌고 다니면서 괴롭힌 책들을 세상에 내놓으려니 쑥쓰럽다. 코너의 소개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중에서)

여러분에겐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 무엇인가요? 책 만드는 편집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려보았습니다.

아래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2012년 9월 1일자 Pressian Book Review》 2호에 실렸다. 책사진을 찍어 준 것은 회사 홍보부의 장미경 씨이다.



편집자의 책상


책장을 뒤지다가 문득 생각했다. 가진 책으로써 한 사람을 재구축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시간의 가혹한 전진으로 인해 어떤 책은 기억에나 있을 뿐 실물을 찾을 길 없고, 어떤 책은 추억만을 남긴 채 다른 사람 손으로 옮겨가 버렸다. 

고등학교까지 읽은 책 중에서 내 손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대학 시절 모았던 책도 거의 사라졌다. 결혼할 때 옛 집에 두고 왔는데, 선친께서 어느 날 협소한 공간과 날리는 먼지를 이유로 모조리 없애 버렸다. 거기에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민음사, 1979) 초판본이 있다. 고교 시절 충격 속에서 영혼 깊이 뿌리 내렸던 세속주의자 아하츠 페르스가 내 마음에서 끝끝내 살아남아, 결국 상아탑을 오가는 말들의 신성한 영토 대신 출판을 선택해 지식을 세속화하고 세속을 지식화하는 순환 운동을 천업으로 삼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사들인 수많은 문예지가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사랑한 책은, 기억이 맞다면,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콩쿠르 상 수상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0)가 실렸던 《문예중앙》이다. 소설가를 지망했던 나는 이 작품을 틈날 때마다 읽었다. 그리고 극도로 예민한 문체로 스치듯 기록된 인물들의 감정선을 내 소설에 끌어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소설 쓰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소설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 더 있다면, 김수행이 옮긴 마르크스의 『자본 Ⅰ』(비봉출판사, 1989)이 있다. 잉여를 독점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과학적 붕괴를 증명한 이 책은 1990년대 초 한창 내가 몰두하기 시작한 프랑스 사상가들 담론을 유행이 아니라 특정한 사유방식, 즉 비판이론으로 수용하도록 해주었으며, 지금껏 내 출판의 한 인문적 근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세 시집은 날 버리지 않았다. 작고 가벼운 데다 책상 근처에 놓아두고 편애하여 늘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와 장정일의 『서울에서 보낸 3주일』(청하, 1988)이다. 모두 고교 문예반 출신으로 소설가 겸 시인을 꿈꾸었던 나를 좌절시킨 시집들이요, 평론을 하거나 시집을 출판할 때 견주어 보면서 발화법을 따져보도록 만든 시집들이다. 거기엔 아직도 펄떡이는, 영원히 싱싱한 언어가 있다.

대학 시절 이래, 내 문화적 감식안과 문체의 기반을 이루는 책도 계속 나를 따르고 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심설당, 1988)은 십여 차례나 읽었는데도 아직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과연 그랬다. 이 말이 쓰인 책을 정신의 지도로 삼을 수 있어 나는 오래 행복했다. 『황홀경의 사상』(홍성사, 1984)을 썼던 분의 육성을 들으며 수업했던 시절은 얼마나 좋았던가? 그는 자료를 수없이 뒤적이면서 발로 하는 문학을 주로 가르쳤지만, 우리는 결코 속지 않고 행간을 더듬어 그가 가슴으로 하는 문학에서도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아내곤 했다. 안견에서 터너까지 황금빛 유토피아에 매혹된 예술가를 추적하는 이 책의 문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을 읽지 않았다면 내 사고법은 어쩌면 아직도 촌구석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이 책으로부터 우리는 언어와 사물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합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힘을 습득했고, 그로써 관습을 생산해 자신을 실현하는 권력의 보이지 않는 작용을 통찰하는 새로운 비판 이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문학도, 책도 이러한 통찰이 없다면 모두 허깨비가 아닐까?

그러나 그 어떤 책도 내게는 결국 니체를 만나기 위한 예비 과정이었을 것이다. 군에 있던 시절,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을 모두 읽음으로써 나는 내 정신적 삶의 받침돌을 간신히 놓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즐거운 지식』(청하, 1989)을 특히 사랑해서 여러 번 읽었는데, 아마도 그건 순전히 제목 덕분이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한 우울한 지식이 아니라 어떤 목적도 없이 영원히 생성을 생성하는, 영원회귀의 즐거운 지식은 한없이 나를 끌어들였다.

『선과 모터사이클 수리 기술』(문학과지성사, 2010)로 다시 번역되어 나온(얼마나 열광했던가!) 『선을 찾는 늑대』(고려원, 1991)도 있다. 한 중년 남자가 아들을 뒤에 태운 채 오토바이로 미국을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이성과 신비, 정신과 육체, 내면과 외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사고하는 이 작품을 만나면서 나는 내 정신의 오랜 소외 지대였던 동양의 세계를 간신히 호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 늘 있었지만 글쓰기 바로 직전에 갑자기 손안에서 빠져 나간 책이 있다. 수직으로 무질서하게 쌓아 올린 책 기둥 안 어딘가에 있으리라. 『편집자란 무엇인가』(일지사, 1993)다. 유진 오닐과 윌리엄 포크너의 편집자였던 삭스 카민즈의 일생을 다룬 이 책이 아니었다면 편집자라는 직업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친구이자 조언자이며 후원인이며 독자의 대변자이자 동료이기도 한 편집자의 일생을 이만큼이나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을 나는 지금껏 좀처럼 만난 적이 없다.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거의 반드시 챙기는 책이 『일본의 소출판』(신한미디어, 2000)이다. 시장성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출판 분야를 택해서 씩씩하고 늠름하게 자기 길을 걸으며 책의 가치를 실현해 가고 있는 일본의 작은 출판사 사장들 인터뷰 모음집이다. 『일본 소출판사 순례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7)와 쌍을 이루는 책인데, 출판은 역시 이런 가치 실현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올바르기도 하고 재미도 있을 수 있다. 출판인이라면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황금가지, 2002)는, 내가 직접 기획했던 책이지만,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치는 책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의 정의와 구조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야기가 적용되는 모든 곳, 그러니까 만약 편집자라면 저자와 이야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책에 구조화하는 작업에서 좋은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이다.

『미국 출판문화 들여다보기』(대한출판문화협회, 2011)는 비매품으로 있기에는 정말 억울한 책이다. 원제가 ‘인쇄 최후의 시대’인 이 책은 1990년대 이후 출판에 나타난 가장 극적인 변화들을 문화 사회학적으로 추적한 걸작이다. 책이 신성한 물건에서 탈신비화되어 일상품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파한 책은 정녕 드물 것이다. 현재 책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의 배후에 어떤 사회법칙이 작용하는지 알고 싶다면 누구나 이 책을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책장을 정리해 책을 선별하고, 때로 지금은 더 이상 곁에 존재하지 않는 옛 친구들까지 불러 모으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다. 과거로부터 나에게 흘러와 나를 이루고, 다시 나로부터 뻗어나가 다른 곳에 연결될 어떤 지점을 복구하는 작업. 끝내 감추고 싶었던 정신적 흉터를 갑자기 세상에 내보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