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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도스토옙스키와 민중의 발견

우리 민족의 가장 숭고하고 단호한 성격의 특징은 정의감과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건 없건 수탉처럼 달려드는 습성, 이런 결점은 그들에게 없다.
표면에 뒤집어쓰고 있는 껍질을 벗겨 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신중하게 그 알맹이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민중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자도 민중에게는 가르칠 것이 많지 않다.
단언하건대, 오히려 반대로 현자들 자신이 민중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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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위기를 넘어서서, 또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베리아 감옥 생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민중의 진실이다.
고통 어린 체험 속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민중을 가르치려 하는 태도, 민중을 이끌려고 하는 태도를 버리고, 민중의 마음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아니, 고생을 거쳐 그러한 눈을 얻었기에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비록 평생을 민중과 일한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중략) 40년 동안 매일같이 그들과 일 속에서 접한다 하더라도, (중략) 근본적으로는 결코 민중과 합치될 수 없다. 모든 것은 단지 시각적인 기만일 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상층 귀족, 부르주아, 지식인이 민중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민중을 대변하겠다고 깝치는 것을 “시각적 기만”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울러, 완장 차고 제복 입은 놈들, 즉 권력자들은 그 자체로 "사회적 비리"라고 통렬하게 고발한다. (물론, 그 안에도 더 나쁜 제복이 있고, 더 포악한 제복도 있다.) 이는 민중들이 완장 찬 넘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어떻게 각성하는가. 연극을 통해 스스로 각성한다. 죄수들이 크리스마스 공연을 마치고 만족해서 잠드는 밤은 이 작품의 백미다.
“이 같은 불행한 사람들에게도 잠시나마 자기 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인간답게 웃을 수 있는 것, 일순간이라도 감옥 같지 않은 현실을 느끼는 것 등이 허용됨으로써, 그들은 잠시나마 정신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어설프게 가르치거나 대변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얼마나 많은 재능과 실력이 우리 러시아에서 가끔은 아무런 쓸모없이 부자유와 힘겨운 운명 속에서 파멸해 가고 있는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ps. 문학 읽은 지 너무 오래된 듯해서... 하루 종일 다른 책 읽는 사이사이로 뒤적뒤적.... 하지만.... 너무 재밌어서.... 본래 읽어야 할 책은....ㅜㅜ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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