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가 지능적 협업을 통해서 새로운 종류의 일을 창출하는 ‘휴머리즘(human+algorithm)’의 시대다. 인공지능은 기존 데이터 패턴을 빠르게 파악하고, 거기에 인간이 창조성을 더해서 눈부신 성취를 얻자는 말이다. 이처럼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 자신의 고유성을 촉진하는 쪽으로 진화할 것을 인류에게 요구한다.
인공지능과 공진화하려 할 때 ‘인간의 고유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토머스 프리드먼의 『늦어서 고마워』에 중요한 실마리 하나가 나온다. ‘정지 또는 휴식하는 능력’이다. “기계는 정지 버튼을 누르면 멈춘다. 그러나 인간에게 정지 버튼을 누르면 무언가를 시작한다.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하고, 전제를 다시 생각하며, 무엇이 가능한지 다시 구상하고, 무엇보다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는 믿음을 다시 연결한다. 일단 그 일을 하고 나면 더 나은 길을 재구상할 수 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학습하는 인공지능과 달리,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 때문에 쉬지 않고는 배울 수 없다. 한때는 ‘4당 5락’ 식의 연속해서 공부하는 능력을 시험하는 문제로 엘리트를 선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면으로는 인공지능이 이미 인간을 영원히 능가하므로, 아무나 인공지능과 접속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시답잖은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드먼이 보여주듯, 창조성은 인간이 본래부터 잘하기 힘든 ‘연속학습 능력’보다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얼마만큼 민감한지, 정지 버튼 상태에서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달린 듯하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인간은 여가를 얻으려고 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여기서 ‘일’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스콜리아(Ascholia)다. 이 말은 스콜레(schole), 즉 ‘여가’의 부재를 뜻한다. 일하는 인간은 부정적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여가다. 일/활동이 없을 때에만 인간은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가를 뜻하는 단어 스콜레가 나중에 라틴어 스콜라(schola)를 거쳐서 영어로 스쿨(school)이 된다. 그러고 보면 학교란 어떻게 일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여가를 잘 보낼 것인가를 배우는 곳이다. 인간의 창조성은 휴식을 통해 비로소 고양되니까 말이다. 인공지능시대의 도래는 이 사실을 새삼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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