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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책과 미래] 뻔뻔함과 부끄러움



“노인장! 눈 깜짝할 사이에 개들에게 큰 봉변을 당할 뻔했구려. 그랬다면 그대는 내게 치욕을 안겨주었을 것이오.”(『오뒷세이아』 14권 37~39행)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오랜 방랑 끝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귀향한다. 거지꼴을 한 그가 찾은 곳은 고향 이타케 성 외곽에 있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집이다. 그런데 추레한 늙은이가 집 앞을 기웃대자 사나운 사냥개들이 먼저 그에게 달려든다. 에우마이오스가 재빠르게 바깥으로 나왔기에 망정이지, 천하의 오뒷세우스가 개한테 물리는 망신을 살 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에서 후세가 기억하는 것은 오뒷세우스의 봉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나그네의 고통을 자신의 치욕으로 받아들인 에우마이오스의 환대다. 이 수치심이 윤리의 출발을 이루기 때문이다. 에우마이오스는 “내가 당신을 그 상태로 내버려둔 게 부끄럽다”고 말한다. 자기 곁에 고통을 당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허약한 나그네가 자신의 눈앞에서 아픔을 겪도록 한 것만으로도 그는 커다란 치욕을 느낀다.

무엇이 치욕인지 깨닫는 일에서부터 문명은 출발한다. 한 사회가 약자를 환대하느냐, 박대하느냐에 따라 문명과 야만은 갈린다. 의무 복무 중인 군인을 사저에 배치한 후 노예처럼 부리는 사회는 야만이다. 프랜차이즈 체인을 만든 후 자기이익만 극대화하려고 불리한 가입자를 압박하는 사회는 야만이다. 외국인노동자를 불법체류자로 만들고, 이를 빌미로 착취하는 사회는 야만이다. 건물주가 충분히 먹고살 만한데도 지대 상승을 빌미로 오랫동안 장사하던 가게들을 내모는 사회는 야만이다.

『혐오와 수치심』에서 마사 누스봄은 인간이 수치를 느낀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평가한다. 수치심이란 인생에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그 가치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일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수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다. 수치를 아는 인간만이 ‘더 나은 존재’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수치의 반대쪽에 ‘뻔뻔함’이 있다. 뻔뻔함이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칙에 함몰되어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 상태다. 들뢰즈는 이를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은 것”으로, “우리 시대와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는 것”으로 규탄했다. 뻔뻔한 ‘갑’들의 횡포로 세상이 연일 시끄럽다. 약자의 고통을 치욕 삼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 문명의 등줄기에 올라서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