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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한 번 더, 미칠 정도로, 확실히, 놀아라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이번에는 사뮈엘 베케트와 돈키호테를 빌려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어보았습니다. 발표했던 것을 조금 손보아서 올려둡니다. 






한 번 더, 미칠 정도로, 확실히, 놀아라



“인간이란 형편없이 조악할 뿐이다.”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통에 불과하다.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죽음이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아득한 무의미로 전락한다. 필부라면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자라 할지라도 ‘가만한 당신’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예고된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영웅 오이디푸스조차 노년에 이르러서는 절망을 깨달음으로 받는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되도록 빨리 왔던 곳으로 가는 게 그다음으로 좋은 일이라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춘이 지나면 누가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누가 노고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오? 시기, 파쟁, 불화, 전투와 살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난받는 노년이 그의 몫으로 덧붙여지지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224~1233행) 

인간의 삶이란 보잘것없는 것이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년, 고생과 노고에 속박된 장년, 조롱당하고 비난받는 노년으로 이루어진, 허무한 시간의 계열체일 뿐이다. 기를 쓰며 애써도 결국에는 ‘안 되겠는걸’로 마감하는 게 고작이다. 진실이란 이토록 냉혹하고, 끝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현세의 질서대로 사는 자들의 최후는 빤하다. 죽음이 오고, 망각이 덮치고, 무(無)로 돌아간다. 인생은 무상하다. 덧없음으로 귀착되는 이 세계의 문법을 거부하고 무의미로 흘러가는 인생 경로를 바꾸지 못하면, 당연히 결말도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를 생성하지 않는 ‘또 다른’ 인생도 있을 수 있다. 문학의 탐구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대로 살아선 안 되겠기에, 또 다른 삶을 갈망하고 더 나은 결말을 꿈꾸어 볼 수밖에 없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자’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 왔지.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싸움을 다시 계속해 왔단 말이야.”

사뮈엘 베케트는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와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사이에 인간을 걸쳐둔다.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건 분명하지만, 아직 모든 걸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엄연하다. 따라서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에게 인생은 ‘계속할 수 없다’와 ‘계속할 것이다’를 되풀이하는 ‘절망적 희망의 놀이’가 된다.

하지만 인생에 ‘새로운’ 좌절은 없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비웃었듯, 인간의 삶이란 본래부터 좌절이다. 힘이 남았을 땐 ‘한 번 더’ 해보는 것이고, 아닐 땐 예정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것이다. 셰에라자드 왕비는 세상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흥미 있는 이야기로 만든다. 하지만 보상은 고작 하루의 목숨을 벌어 저녁이 되면 또다시 죽음의 공포를 맞이하는 일뿐이다. 이야기꾼으로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이 ‘놀이’를 한없이 반복하는 일이다. 이야기로써 살아감의 의미를 생산하고,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절망하는 밤이 오기 전에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일이자 문학의 운명이다.

『천일야화』야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실제 삶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길은 하나. ‘한 번 더’ 이 놀이를 신나게, 죽음이 올 때까지 기꺼이 즐기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 일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 스페인에 있었다. 기사 이야기를 좋아하다 못해서 세상 자체를 기사 이야기로 만들려 했던 사람, 돈키호테 말이다.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세계에는 공주도 있어야 하고, 성도 있어야 하고, 거인도 있어야 하고, 악당도 있어야 한다. 물론 실제의 ‘초라한 현실’에 이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절망을 모른다. 현실의 질서를 좇아서 더러운 삶을 견디는 대신, 그는 언어의 마법을 이용해서 자기 모험에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현실에다 발명하는 쪽을 택한다. 재미도 흥미도 없는 현실의 언어 문법을 무시하고, 모험을 무화하는 이 세상에 망상의 언어를 덮씌운 후 거기에 맞추어 살아 버린다. 그러고는 ‘있는 그대로’만 세상을 인지하는 ‘이성의 환자’인 산초를 거세게 꾸짖는다.

“네가 나와 더불어 편력한 지도 꽤나 되었건만 겉으로 보기에는 편력 기사들이 하는 모든 일이 망상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친 듯해 보여도 사실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돈키호테는 미친 게 아니다. 자신이 ‘망상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친 듯해 보’인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역시 거부한다.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질서에 집착하고, 이 세상을 자신이 바라는 이상대로 창조한다. 진부하고 식상하며 결과가 정해진 필부의 언어를 거부하고 ‘기사의 언어’를 써서 이 세상을 완전히 해방해 버린다. 그로써 돈키호테는 자유의 완벽한 상징이 된다.

돈키호테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묘비명이 그의 일생을 증언한다.

“용기가 하늘을 찌른 강인한 이달고 이곳에 잠드노라.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했음을 깨닫노라.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니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런 시절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미쳐서 살다 제정신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을 희롱했던 이 위대한 기사 역시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 우리 모두와 ‘똑같이’ 제정신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제대로 놀아보았기에 돈키호테는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운명이 이미 정해졌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한 번 더’ 즐겁게, 미칠 정도로, 확실히 놀아라. 돈키호테가 증명하듯, 그 대가는 불멸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