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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삶을 증오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옛날에는 노예가 될지 모를 위험이 있었다면, 지금은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김영사, 장혜경 옮김, 2022)에서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 말에는 현대인을 움켜쥔 삶의 아이러니가 섬뜩하게 표현돼 있다.



오늘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생동감 넘치게 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인공지능 도입에 따른 일상생활의 급진적 자동화, 자기 생각의 독립적 표현보다 남의 생각에 대한 공감과 공유를 조장하는 소셜미디어, 하루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문자와 메일 등 스마트 업무 환경 등은 생각의 로봇화를 촉진한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산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정신없이 사는 것이다. 기계는 점차 똑똑해지고 인간은 갈수록 멍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도 한밤중에 갑자기 “삶이 무의미한 듯한 기분, 가진 것은 많지만 웃을 일이라고는 없는 듯한 기분,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기분”에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자기 삶에 대한 증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현대의 가장 큰 심리적 질병이다. ‘좋아요’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프롬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로 여전히 삶을 사랑할까?”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삶을 여전히, 꾸준히, 지속해서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순간순간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느냐”를 중시한다.



우리 삶을 진짜로 바꾸지 못하고 우리 이미지만 ‘있어 보이게’ 연출해 주는 인스타그램을 보라. 우리는 이제 “존재가 아니라 퍼포먼스”를 중요하게 여긴다.



원인은 물질의 신격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마케팅의 자극에 넘어간 사람들은 내면의 함양보다 물질의 소유를 더 숭배하면서 자신을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자신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바깥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저 바깥의 무엇, 즉 물건, 사람, 사건, 지위 등에 더 자주 끌리고 쓸리고 들끓을수록, 인간의 내면은 빠르게 활력을 잃는다. 사랑할 것이 바깥에 있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을 목적 삼아 자기 내면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결국 무력해진다. “삶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란 믿음, 즉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잃는 것이다.



성장과 변화가 멈춘 삶이 곧 죽음이다. 죽음의 힘에 유혹당한 좀비처럼, 살아서 이미 죽은 상태로 세월을 탕진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체 놀이는 흔히 멀티태스킹 형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무력함을 감추고 좀비 됨을 은폐하려고 우리는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쉴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으며,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러면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창조적일 수도 없다. 어떤 일도 자신을 온전히 쏟을 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주해질수록 우리는 무력해지고 삶을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사랑은 인간성의 기초이고, 창조의 원천이며, 문화의 뿌리이다. 이 사랑을 잃으면, 개인도 사회도 병든다.



개인적으로는 나르시시즘, 이기주의, 무기력, 권태 등에 시달리고, 사회적으로는 과잉생산에 따른 환경 파괴, 기술 맹신에 따른 인간 소외, 생명 경시에 따른 대량 멸종 등이 나타난다.



방치하면 극단적 공허감을 못 이기고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거나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현대적 삶의 질곡에 맞서 프롬은 창조성과 활동성의 복원, 즉 삶을 사랑할 자유를 역설한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직시하면서 자신의 온전함과 유일함을 성찰하고 존중하며, 자기를 더 많이 느끼고 관찰하면서 자신과 더 가까워지려고, 즉 창조적 존재가 되려고 애써야 한다.



아울러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벗어나 “가만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려는, 들여다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을 통해 내적 활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바깥에서 가치를 찾을수록 인간은 약해진다. 인내와 용기를 품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날이 강해진다.



줄기에 힘을 응축하다가 때 되면 저절로 피어나는 꽃처럼, 오늘 하루 자신을 사랑할 이유를 고요히 성찰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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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수정했습니다.



더 쓰면 줄이고 싶고,

덜 쓰면 늘이고 싶고,

내 마음 나도 모르는......



ps. 제 잡문의 최종본은 페북, 블로그, 아마도 어쩌다 책입니다.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장혜경 옮김(김영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