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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문득문득 편집이야기

편집자의 매카시즘

리처드 에번스의 『에릭 홉스봄 평전』(책과함께, 2022)에서 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극단의 시대』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둘러싼 이상한 논란이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영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비판적 논쟁과 함께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갈리마르, 알뱅 미셸, 파야르 등 프랑스 주요 출판사들이 제작비, 번역비 등을 이유로 이 책의 출판을 거부한 것이다. 전작인 『혁명의 시대』가 기대보다 안 팔린 이유는 분명히 있었으나 핑계였다.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소비에트 중심으로 기울어져 미국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서구 민주주의를 폄훼하는 등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유대인 학살과 소비에트 수용소 모두를 극히 축소해 다루면서 기존의 해석적 프레임을 지나치게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을 부르자 사회적 분위기가 기이한 억압으로 작용해서 프랑스 출판사들이 모조리 출판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 책의 프랑스어판은 벨기에 브뤼셀 기반의 소출판사 에디시옹스 콤플렉스에서 출판됐다.
진보 신문인 『리베라시옹』은 편집자들의 무책임한 회피를 두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반체제적 관점의 신참자들은 영어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 편집자의 매카시즘에 오염되지 않은 다른 19개 언어 중 하나를 배워야 할 것이다."

홉스봄 역시 파리의 출판계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했다. 

"나는 검열보다는 관습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파리 출판계 사람들에게 흔한, 시대에 뒤진 불관용을 거론하고 싶다. (중략) 소수의 지적 엘리트들이 프랑스 대중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좋지 않은지 결정하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시대의 분위기에 저항하는 것도 분명히 출판사의 의무였다. 그렇지 않다면 판테온 출판사는 1950년대 초에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책을 결코 내지 못했을 것이고, 에이나우디 출판사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시절에 침묵을 지켰을 것이며, 독일 망명자들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단 한 글자도 발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극단의 시대』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놀랍도록 적절하게 분석했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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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편집자들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말이다. 

시대적 분위기에 저항해서 필자들이 기꺼이 할 말을 하도록 돕는 것, 거기에 출판의 본원적 힘이 있다.

이 책에는 홉스봄의 저술 활동과 겹쳐지는 195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서구 및 세계 출판계에서 벌어지는 이면의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하나만으로도 편집자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