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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책이 말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 - 마흔 권의 책으로 말하는 2010년대 책 의 결산

 

2019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또한 달리는 말에서 갈라진 벽의 틈새를 보듯, 2010년대도 훌쩍 지나갔다. 지난 10년 책의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2009년 아이폰 출시와 함께 ‘스티브 잡스’가 열어젖힌 ‘제4차 산업혁명’의 봇물에 휩쓸려 그사이 삶의 전 영역이 ‘좋아요’와 ‘하트’ 놀이에 중독됐다. ‘생각을 빼앗긴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새 정보와 상호작용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됐다.

머리 한쪽이 늘 멍한 산만함에서 우리 정신을 지켜 주는 것은 역시 호흡 긴 서사인 책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다시, 책으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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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거쳐 『다시, 책으로』까지 정보 혁명이 가져온 거대한 삶의 변화 속에서 책은 끝없이 이 혁명의 의미를 성찰해 왔다.

 

지난 10년 동안 책의 대지에 핀 꽃들은 자주 불(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먼저,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유의 어둠 속에 찬란한 빛을 던졌다. 한국 사회의 만연한 부정의에 경악한 독자들은 ‘분노하라’는 시대의 명령을 기꺼이 따랐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했는가.

불공정이다. 서민들은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라며 학자금 대출과 알바 인생에 절망하는데, 신청도 안 한 장학금 챙겨 가며 공부한 전직 법무부 장관의 딸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세상, 즉 ‘특권’을 통해 쌓은 스펙을 제 능력인 양 자부하는 ‘20 vs 80의 사회’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불평등이다. 부의 세습이 노골화돼 부익부빈익빈이 갈수록 심화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진 ‘21세기 자본’의 사회다. 사람들은 점차 우리 사회 온갖 문제의 실체가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근대 이후 처음으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 사는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기성세대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청년들 대다수를 비정규 노동에 빠뜨린 ‘불평등 세대’ 등은 저성장이 고착화된 한국사회 전반의 구조를 바로잡지 못하면, 조만간 세대 전쟁의 홍역이 덮쳐 올 것임을 우려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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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에서 『21세기 자본』을 거쳐 『불평등의 세대』까지 부정의, 불공정, 불평등의 물결이 2010년대 책의 세계를 뒤덮었다.

 

불안정 노동이다. 일이 행복을 주지 못하는데 왜 몸 바쳐 일해야 하는가. 시민들이 묻는다. 차라리 적당히 일하고 작은 행복이라도 확실히 챙기는 쪽이 낫지 않은가. ‘피로사회’는 성과에 집착하면서 죽음에까지 자기를 몰아붙이는 자기 착취의 역학을 폭로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미생’인 세상인데, 돈 대신 자신을 고갈시키지 않는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이에 청년들은 ‘자존감 수업’을 받고 ‘미움받을 용기’를 행한다. 삶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 ‘동네책방’을 순례하고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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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에서 『자존감 수업』을 거쳐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까지 책은 노동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은 세계에서 나 중심의 삶을 고민했다.

 

가부장제 가족주의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계기로 페미니즘이 다시 일어섰다. 여성이 쉽게 살해되고 폭행당하며 차별받는 사회는 작동을 멈춰야 한다. 편견으로 점철된 세상을 살아가는 ‘82년생 김지영’이 더는 없어야 한다. 여성은 벌써 주체인데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고 일깨운다. 그래서 여성들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백래시’, ‘탈코르셋’ 등 해방의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 ‘이상한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가족 형태가 꾸준히 시도되고 ‘딸에 대하여’, ‘대도시의 사랑법’ 등 퀴어의 일상화도 이제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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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거쳐 『82년생 김지영』으로 거대하게 분출됐다. 책의 세계는 가부장제 가족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가족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주목했다.  

 

언어의 소외다. 여론이 ‘강남 좌파’의 감수성에 갇히는 경향을 보이면서 김용균들의 목소리를 담는 담론이 증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스러져 가는 이들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책의 입술이 목소리 없는 이들한테 끝없이 열릴 수밖에 없다. ‘소년이 온다’의 높은 문학적 성취도, ‘사당동 더하기 25’, ‘금요일엔 돌아오렴’, ‘고기로 태어나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 인간의 조건을 살피는 기록의 존엄성도 여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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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주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낮은 목소리를 담아 왔다. 『소년이 온다』에서 『고기로 태어나서』를 거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소리 없는 이들한테 입술을 빌려 주는 움직임이 책에서는 주류였다.

 

정치는 난잡하고, 경제는 암울하고, 사회는 비참하다. 세상이 타락한 자들을 위한 숫자 놀이로 전락한 듯하다. 온통 이익(利)을 말할 뿐 아무도 의(義)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던 얼굴은 어용을 자부하고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를 성찰하던 마음은 위선이 됐다. 촛불과 함께 힘차게 타올랐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는 또다시 무릎이 꺾이는 중이다. 사람들은 ‘닥치고 정치’에 기대를 걸었지만, 현실은 ‘닥쳐라, 정치’로 변해 가고 있다.

희망이 불타 버린 이 자리에서 책은 다시 출발한다. 새해에는 어떤 책이 시대의 죽비가 될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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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문화마당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