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 밤에 흥이 일어서
임규(任奎, 1119~1187)
달빛은 어스름한데 새는 물가로 날고,
안개 앉은 강물은 저절로 물결치네.
고깃배는 어느 곳에서 잠들려 하는가,
아득한 곳에서 한 줄기 뱃노래 소리 들리네.
江村夜興
月黑鳥飛渚,
煙沈江自波.
漁舟何處宿,
漠漠一聲歌.
좋은 시는 한 폭 그림과 같은데, 그 안에서 소리조차 들려줍니다.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임규가 지은 이 작품은 좋은 시의 조건에 온전히 부합합니다.
시인은 저녁 어스름에 강가로 나와 있습니다. 해는 저물어 천지가 완연히 어둑해질 무렵입니다. 그믐달인지, 아니면 구름에 가렸는지 달빛조차 오늘따라 흐릿합니다. 새들은 하나둘씩 둥지를 찾아서 강가 모래톱으로 날아갑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물안개가 일어 강 위로 내려앉습니다. 그 사이로 물결이 일렁입니다. 호젓하면서도 쓸쓸한 기운을 한 폭 그림처럼 펼쳐냈습니다.
시인은 늦은 저녁에 왜 홀로 강가를 거니는 것일까요. 그 사연은 짐작할 수 없지만,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퍼져만 갑니다. 이때 어딘가 먼 곳에서 뱃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부들도 잠들 곳을 찾아서 집으로 가는 것일까요. 그 소리가 유난히 애처롭고 애달프게 들리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입니다.
아아, 인생길 어느 순간에는 누구나 나그네가 됩니다. 코 닿을 곳에 몸을 뉠 집이 있더라도 이런 밤 강가에서 슬픈 뱃노래 소리를 들으면 적막한 법이니까요.
첫 구절에서 월흑(月黑)이란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을 말합니다. 그믐날일 수도 있고, 먹구름에 달빛이 완전히 가린 밤일 수도 있겠죠. 저(渚)는 ‘물가’라는 뜻입니다.
둘째 구절에서 연(煙)은 ‘연기’가 아니라 ‘안개’를 가리킵니다. 자(自)는 ‘저절로’라고 새깁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물결이 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셋째 구절에서 어주(漁舟)는 ‘고기잡이배’입니다. 숙(宿)은 ‘묵다’라는 뜻입니다.
넷째 구절에서 막막(漠漠)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을 가리킵니다. ‘아득하다’라는 말입니다. 가(歌)는 뱃사공이 부르는 노랫소리입니다. 배는 보이지 않고 노랫소리만 들리니 시인의 고독감은 더욱 깊어집니다. 시각과 청각을 교묘하게 아우르면서 정취를 한껏 끌어올렸으니, 가히 절창이라고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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