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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인문학, 삶을 말하다’는 왜 기획되었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기획하고 신설 출판사 길밖의길에서 출간한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시리즈가 나왔다. 김재인의 『삼성이 아니라 국가가 뚫렸다』, 장의준의 『좌파는 어디 있었는가?』, 서동은의 『곡해된 애덤 스미스의 자유 경제』, 문병호의 『왜 우리에게 불의와 불행은 반복되는가?』 등 네 권의 책이 우선 출간된 이 시리즈에 아이디어를 제출한 사람으로 몇 마디 소회가 있어서 아래에 적어 둔다.



‘인문학, 삶을 말하다’는 왜 기획되었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기획한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시리즈에 아이디어를 발의한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소감을 간략히 밝혀두고자 한다. ‘작은 책’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는 큰일을 저질러 놓고 책의 겉모습으로써 이를 슬쩍 가리려는 김종락 대표의 겸손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작은 거인도 있고 커다란 난쟁이도 있으니까 수사(修辭)야 어떤 말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현장을 잠시 떠나 시골마을에서 쉬면서 돌이켜보니 한국 출판, 특히 오랫동안 그 곁을 어슬렁거렸던 문학과 인문학 출판은 세 가지 심각한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지난 스무 해 넘도록 한순간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먼저 고백해 둔다. 책의 몸을 병들게 한 독약의 이름은 ‘돈(자본), 대학(원료), 서점(유통)’이다. 이 세 가지 독약은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 히드라로서, 결국 ‘돈’이라는 몸통으로 수렴될 터이다. 하지만 서로 잠시 나누어 놓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출판의 존재’를 상상하는 데 이쪽이 다소 이롭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인문학) 출판은 대학에 심각히 예속되어 있다. 이미 여러 번 지적된 바 있지만, 대학평가가 시작되고 이에 맞추어 한국연구재단 시스템이 도입된 이래 많은 학자들은 전문적인 논문을 생산해 호구를 해결하는 데 이미 지쳐버렸다. 이에 상아탑의 지식과 사회적 이해관심 사이의 힘찬 통로이자 엄혹한 검증 도구인 ‘단행본’을 쓸 힘이 전반적으로 고갈되었다. 신선하지 않은 재료로 좋은 요리는 불가능한 셈이다. 사태가 벌어지는 현장에 지식을 공급하여 통찰을 제공하려는 출판의 시도는 좌절되기 쉬워졌고, 그 탓에 외래의 책들이 주로 독자의 관심사로 호출되기 일쑤였다. 문제가 있는 곳에 지식을 데려가는, 이른바 ‘지식의 민주화’는 출판의 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성찰하는 ‘대낮의 사유’야말로 책이라는 요리를 제대로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일 터인데, 이 필수가 뿌리부터 썩어버린 것이다.

한편, 한국문학이 언제부터 독자들과 멀어지기 시작했을까. 나는 ‘주례사비평’에 모든 원인을 돌리는 데 반대한다. 그런 일은 비평이 시작된 이래 늘 있었던 것이고, 많은 경우에는 독자의 읽기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잘라 말하면 한국문학이 급격히 독자를 잃어간 것은 문예창작과가 번성하면서부터다. 일부 진단과 달리 문단에 문창과 출신 작가가 많아져서가 아니다.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자면, 작가들이 문창과 교수가 되기를 열망하면서부터이고, 또 어느 순간까지는 쉽게 교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부 작가의 호구는 해결했을지 몰라도, 작가와 사회 사이의 고유한 긴장이 거의 증발되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자본에 포획된 대학과 그 대학에서 밥을 버는 교수의 논리가 문학을 좌지우지하면서 문학이 시민사회와 고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으로써 사회적 영향을 추구하지 않고, 명성으로써 학교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부터 문학은 스스로 파괴된 것이다. 

또 다른 출판을 상상하려면 학교라는 울타리를 끼고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커다란 쇠공을 달고 마라톤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안연’과 같이 학교 바깥에 학문 공동체를 구축하고 그들을 서로 이어 붙여서 새로운 출판 주체를 형성하는 쪽이 오히려 손쉬운 일일 것이다.

돈(자본)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아도 될 터이니 간략히 말하려 한다. 오늘날 책은 오직 자본을 위해 이윤을 발굴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문학/인문학 출판에 ‘동지애’ 또는 ‘우애’는 거의 소멸했다. 덜 된 작품을 침 발라 팔아서 번 돈으로 손해 보는 책을 내준다는,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달콤한 이원론을 아직도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 마음에는 분명 그런 점도 일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익을 주로 사장 개인한테 배당해서 건물 사고 카페 만들고 술집 차린 후 자기 출판사에서 임대료와 행사비를 받는 걸 보면 관심 있는 젯밥은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업 다각화 차원이었다면 회사 이름으로 투자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들어보지 못했다. 회사의 브랜드 자산을 활용해서 오너 일족의 배를 불려온 재벌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갈수록 책이 ‘매출 기계’가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일정한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책은 출간리스트에서 퇴출되거나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출판사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책들의 가격은 서서히 상승하고 독자는 그에 비례해 조금씩 줄어드는 악순환이 많은 곳에서 보고되고 있다. ‘이윤의 미디어’가 아니라 ‘우애의 미디어’로 책을 재발명하지 않는 한 이 추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의 생산자-소비자가 하나의 코뮌을 이루고 노동 등을 품앗이하면서 서로 협동하는 계기를 풍부하게 생성하는 모델이 시도되고, 이를 통해 점차 공동체를 확산하는 프로세스를 힘차게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대자본이 도서유통에 뛰어든 이래, 서점은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출판의 중요한 본질을 파괴하고 자본 효율을 끌어올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이룩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즉, 소수의 돈이 되는 베스트셀러에 발견성을 집중시키고 다수의 돈이 되지 않는 책들은 발견성을 떨어뜨려 자연스레 시장 퇴출을 유도하는 기법이 계속 시도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체 단행본 서적 매출의 거의 70퍼센트 정도가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등 소수 대형서점에 집중된 현재의 유통 현실에서 대부분의 책들은 서점을 통해 독자를 충분히 만날 수 없다. 아니, 만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신문 등 대중매체의 공론성이 크게 약화된 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비밀의 정원』처럼 운이 없다면 거의 도태이고, 잘해야 생존선 근처에서 간당간당 할 뿐이다. 따라서 서점 연결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을 직접 책과 연결하는 새로운 연결망을 생산하는 것이 책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 보려는 출판의 중요한 도전이 되었다. 결국에는 시민사회의 가치를 담은 서적을 생산하고 이를 시민사회 단체 등을 통해 직접 판매하는 서적 생협까지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과 ‘돈’과 ‘서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출판의 형식을 상상해 보는 것은 무척이나 긴급한 과제이다. 사태가 일어난 현장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가깝고, 저비용 또는 저자본으로 생산 또는 소비가 가능하며, (서점만이 아니라) 서점 바깥의 네트워크와 충분히 결합된 출판 말이다. 그 결과 이른바 ‘독립출판’이라고 불리는 출판 형태를 사유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박노해가 이끄는 ‘나눔문화’에서 펴내는 독립잡지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결정적으로는 김교신의 《성서조선》 등 무교회 잡지와 가톨릭 네트워크를 통해 배포되는 신부들의 강론집에서 ‘자본에 포획되지 않은 출판’이라는 아이디어를 개략해서 구체화할 수 있었다.

대안연구공동체의 김종락 대표를 만난 것은 그즈음이다. 지난해 가을, 저녁을 하면서 책의 형태로까지 구체화되지 않은 채로 비자본 출판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나누었으며, 두어 달 전에는 어느 심사 자리에서 만나 이 시리즈 같은 형태의 책으로 만들면 되겠다고 이야기를 교환했다. 기자 출신답게 김 대표는 속도와 실행의 달인이었다. 그사이 여러 필자를 설득해 원고를 받아내고, 출판사 등록까지 마친 후 ‘메르스 사태’가 완전히 닫히기 전에 책으로까지 출판해 버린 것이다. 나 같은 서생은 쫓을 수 없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 책들이 육체성에서 독자에게 어찌 다가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짧고 왜소하다는 말은 이 책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않다. 그 말은 아마도 이 책의 저자들이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다소 줄여서 이야기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저자들은 군더더기 없이 할 말을 모두 하고 있다. 거기다가 자기들이 공부한 학문의 핵심까지도 얹어 전했으니 차라리 이 책은 간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들은 단순히 저자의 쓰기와 독자의 읽기를 이어주려고 출판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그보다는 시민들 사이에서 대화를 발생시키고 또 다른 비자본 연대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제공되었다. 따라서 이 책들은 시민단체에서, 독서모임에서, 학교수업, 강연회 등 다양한 자리에서 토론의 도구로서 쓰일 때 제대로 읽힌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모든 사태가 그러하듯이, ‘메르스’ 역시 국가와 자본에 포획된 삶의 균열을 드러낸다. 그 균열을 함께 성찰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삶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인문학 출판이 희미한 빛을 예감할 수 있는 자리 역시 이 부근 어디가 아닐까. 술 한 잔을 걸치면서 작은 아이디어를 나눈 우정의 자리가 아름다운 결과를 낸 것은 전적으로 김 대표 덕분이다. 발행인인 한기호 소장의 압박 넘치는 권고를 받은 이 짧은 글은 소감의 형식을 띤 고백을 빌려 오직 이 책을 널리 퍼뜨려 보려는 응원의 형식으로만 쓰인 것을 재삼 확인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