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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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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당(崔讜)의 마상기인(馬上寄人, 말 위에서 사람에게 주다) 말 위에서 사람에게 주다 최당(崔讜, 1135~1211) 한 번 이별하고 한 번 만남이 있다면,잠시 헤어지는 것이 또 어찌 상처가 되랴.마음으로 다시 못 볼 걸 알기에,애가 끊어지고 또 끊어지네. 馬上寄人 一別有一見,暫別又何傷.情知不再見,斷腸仍斷腸. 최당은 고려 중기 문인입니다. 관직에 나아갔다 은퇴한 후 친구들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해서 시와 술을 즐겼기에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렸다는 말이 전합니다. 이 시는 이별의 정을 노래한 별시(別詩)입니다. 임을 두고 떠나가는 말 위에서 헤어지는 마음을 담아 남긴 시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을 담은 시의 정조가 솔직하면서도 애절해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돌아옴을 아는 이별은 슬퍼도 슬프지 않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별은 상처가 아니라 추억을 남길 뿐..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고조기(高兆基, ?~1157)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렸는지시냇물소리 한 자락 베갯머리 서쪽으로 흘렀네.새벽에 뜰 앞의 나무를 쳐다보니잠든 새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았구나. 山莊雨夜 昨夜松堂雨,溪聲一枕西.平明看庭樹,宿鳥未離棲. 맑고 깨끗한 시입니다.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글자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눈으로는 새벽 풍경이 선연히 보이고 귀로는 물소리도 들려오니 저절로 감탄이 돋습니다. 시골의 새벽은 새소리로 가득합니다. 소쩍새, 부엉이 같은 밤새들 울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닭이 울어 젖히고 낮새들이 서둘러 일어나 벌레 잡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려시대 시인 고조기가 맞은 이 새벽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풀벌레조차 울음을 잊은 듯 적막합니다. 그때, 시인은..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김부식(金富軾)의 대흥사에서 소쩍새 울음을 듣다(大興寺聞子規) 대흥사(大興寺)에서 소쩍새 울음을 듣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속세 손님의 꿈은 이미 끊어졌는데,소쩍새는 울다가 또 흐느끼네.세상에 이제 공야장(公冶長)이 없거늘,누가 알겠는가, 마음에 맺힌 한을. 大興寺聞子規 俗客夢已斷,子規啼尙咽. 世無公冶長, 誰知心所結. 김부식은 고려 인종 때 문인으로 『삼국사기』를 지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도 밝았습니다.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이 주도한 서경(西京, 평양) 천도 운동을 저지하고 이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압한 공로로 정권을 잡아서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며, 말년에는 스스로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사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었을 만큼 문벌 귀족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흥사(大興寺)는 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장연우(張延祐)의 한송정(寒松亭)에서 부르는 노래(寒松亭曲) 한송정(寒松亭)에서 부르는 노래 장연우(張延祐, ?~1015) 한송정 밤에 달빛은 밝고,경포대 가을은 물결이 고요하네.슬피 울며 오락가락하나니믿음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寒松亭曲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이 시는 지명(地名)이 들어 있기에 배경 지식이 없으면 해독되지 않습니다. 첫째 구절의 한송(寒松)은 ‘차가운 소나무’가 아니라 강릉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정자인 한송정(寒松亭)을, 둘째 구절의 경포(鏡浦) 역시 ‘거울 포구’가 아니라 강릉의 호수인 경포대(鏡浦臺)를 뜻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엉뚱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구절에서 월백(月白)은 ‘달빛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구름 한 조각 없는 맑은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올라 교교히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밤은 달..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치원(崔致遠)의 가을밤 빗속에서(秋夜雨中) 가을밤 빗속에서 최치원(崔致遠, 857~?) 가을바람에 씁쓸히 읊나니,온 세상에 날 알아줄 이 적구나.창밖에는 밤비가 내리고,등불 앞에는 만리를 떠도는 마음이여! 秋夜雨中秋風惟苦吟,擧世少知音.窓外三更雨,燈前萬里心. 최치원은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鼻祖)에 해당합니다.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으로 태어났기에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뜻을 펼쳐보려고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뉴욕으로 조기 유학을 간 셈입니다. 어려서 이미 천재였던 그는 유학한 지 6년 만이 열여덟 살에 빈공과(賓貢科, 외국인 대상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합니다.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을 받아 관역순관이라는 벼슬을 할 때, 난을 일으킨 황소를 토벌하자는 격문(「토황소..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이인로(李仁老)의 천심원 벽에 부쳐서(題天尋院壁) 천심원(天尋院) 벽에 부쳐서 이인로(李仁老) 손님을 기다렸는데 손님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스님을 찾았는데 스님 역시 보이지 않네.남아 있기는 오직 숲 너머 새 한 마리,고이고이 권하시네, 술병을 들라고. 題天尋院壁 待客客未到,尋僧僧亦無.惟餘林外鳥,款款勸提壺. 지난주에 이어 이인로의 시를 읽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연인에게서 사랑할 이유를 찾아내듯이, 술꾼 역시 언제, 어디서든 술 마실 이유를 찾고야 말지요. 이 작품은 천심원(天尋院) 벽에 써 붙인 시입니다. 천심원은 고려시대 때 개성 바깥에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길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면서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화자는 천심원에서 홀로 술병을 기울입니다. 기다리는 손님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천심원을 관리하는 스님 역시 자리를 ..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이인로(李仁老)의 산에서 살다(山居) 산에서 살다(山居) 이인로(李仁老, 1152~1220) 봄이 갔어도 꽃은 아직도 피어 있고,하늘이 맑은데 골짜기는 저절로 그늘지네.두견새가 대낮에 우짖는 소리를 들으니비로소 알겠네, 사는 곳이 깊숙한 것을. 山居 春去花猶在,天晴谷自陰.杜鵑啼白晝,始覺卜居深. 이인로는 고려 중기의 시인으로 호는 쌍명재(雙明齋)인데, 가장 오래된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10대 후반, 무신란을 피해 불문에 귀의했다가 10년 만이 스물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벼슬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급한 성미 탓에 크게 쓰이지는 못했고,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죽림칠현을 본받고자 시와 술을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제목인 ‘산거(山居)’는 산속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무신란을 피해 골짝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숨어 ..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맹호연(孟浩然)의 대우사 의공의 선방에 부쳐서(大禹寺義公禪房) 대우사(大禹寺) 의공(義公)의 선방(禪房)에 부쳐서 맹호연(孟浩然, 689~740) 저녁놀에 연이어 내리는 비는 촉촉하고,맑디맑은 푸름은 뜨락 그늘에 떨어지네.연꽃의 맑음을 바라보고 있노라니,바야흐로 알겠네, 물들지 않은 마음을. 題大禹寺義公禪房 夕陽連雨足,空翠落庭陰.看取蓮花淨,方知不染心. 개인적으로 저는 맹호연의 시를 좋아합니다. 양양(襄陽) 사람으로 젊은 날에는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공부를 닦았고, 마흔 살쯤에 장안으로 나와서 출세하려 했으나 과거에는 낙방했습니다. 하지만 시로써 이름을 날리면서 장구령(張九齡), 왕유(王維) 등과 어울렸습니다. 그의 시는 자연을 벗 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는 높고 맑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표현이 아직 참신한 부분이 많아 읽는 기쁨을 줍니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