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고조기(高兆基, ?~1157)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렸는지

시냇물소리 한 자락 베갯머리 서쪽으로 흘렀네.

새벽에 뜰 앞의 나무를 쳐다보니

잠든 새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았구나.


山莊雨夜


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棲.



맑고 깨끗한 시입니다.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글자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눈으로는 새벽 풍경이 선연히 보이고 귀로는 물소리도 들려오니 저절로 감탄이 돋습니다. 시골의 새벽은 새소리로 가득합니다. 소쩍새, 부엉이 같은 밤새들 울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닭이 울어 젖히고 낮새들이 서둘러 일어나 벌레 잡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려시대 시인 고조기가 맞은 이 새벽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풀벌레조차 울음을 잊은 듯 적막합니다. 그때, 시인은 문득 잠결에 들었던 시냇물소리가 생각납니다. 아하, 그 소리가 사실은 시냇물소리가 아니라 빗소리였던 것입니다. 밤사이 비는 내렸다 그치고, 새들은 젖은 깃털을 말리느라 아직 둥지를 뜨지 못했습니다. 이 새벽, 풍경은 유난히 선명하고, 마음은 더욱 청신(淸新)합니다. 창을 열어 뜰을 내다보는 시인의 정신이 맑아집니다. 세속을 온통 털어버린 듯, 투명해서 들여다보일 것만 같습니다.


첫 구절의 작야(昨夜)는 ‘어젯밤’이라는 뜻입니다. 송당(松堂)은 시인이 머무르는 집 이름입니다. 산속 솔숲에 있는지, 소나무로 지어서인지 ‘소나무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둘째 구절의 계성(溪聲)은 ‘시냇물소리’를 말합니다. 시인이 있는 집 근처에 개울이 있었나 봅니다. 간밤에는 개울이 어쩐 일인지 잠을 깨울 만큼 큰 소리로 흘렀습니다. 잠결에 시인은 무심하게 그 소리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셋째 구절의 평명(平明)은 해 뜨는 시간, 즉 새벽을 뜻합니다. 여명(黎明)이라고도 합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시인은 문득 바깥이 궁금해집니다. 무언가 평소와 느낌이 다른 이상한 새벽입니다. 간밤에 시끄럽던 시냇물소리조차 고요합니다. 웬일인지 새벽을 들썩이던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낯선 기분에 시인은 서둘러 창을 열고 뜰을 내다봅니다. 일상의 시간이 멈추고 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넷째 구절에서 숙(宿)은 ‘머물다’ ‘묵다’ ‘잠들다’ 등으로 새깁니다. 서(棲)는 ‘둥지’를 말합니다. 숲이 온통 촉촉이 젖었습니다. 새들은 깃털을 말리느라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제야 시인은 깨닫습니다. 간밤 시냇물소리가 실은 빗소리였음을. 아, 시적 발견을 가져오는 것을 ‘경이(驚異)’라고 합니다. 삶에서 순간순간 다가오는 경이를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 인생을 새롭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