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이인로(李仁老)의 산에서 살다(山居)

산에서 살다(山居)


이인로(李仁老, 1152~1220)


봄이 갔어도 꽃은 아직도 피어 있고,

하늘이 맑은데 골짜기는 저절로 그늘지네.

두견새가 대낮에 우짖는 소리를 들으니

비로소 알겠네, 사는 곳이 깊숙한 것을.


山居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이인로는 고려 중기의 시인으로 호는 쌍명재(雙明齋)인데, 가장 오래된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10대 후반, 무신란을 피해 불문에 귀의했다가 10년 만이 스물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벼슬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급한 성미 탓에 크게 쓰이지는 못했고,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죽림칠현을 본받고자 시와 술을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제목인 ‘산거(山居)’는 산속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무신란을 피해 골짝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숨어 살던 시기의 작품인지, 죽림칠현을 자처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세속을 떠난 듯 노닐 때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청정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뜻만은 분명합니다. 

첫째 구절에서 시인은 집 근처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절기는 이미 봄을 지나 여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어 있는 꽃은 여전히 봄꽃입니다. ‘유(猶)’는 ‘아직’이라고 풀이합니다. ‘재(在)’는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해서 날이 충분히 더워지지 않고 서늘한 덕분일 겁니다. 

둘째 구절에서 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습니다. 그런데 집 주변은 여전히 어두컴컴합니다. 골이 깊숙하고 절벽이 높아 그림자가 하루 종일 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自)는 ’저절로‘로 새기고, 음(陰)은 ’응달, 그늘‘의 뜻입니다. 

셋째 구절은 생물학적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두견(杜鵑)’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지만, 흔히 ‘소쩍새’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소쩍새는 밤새로, 자정부터 새벽까지 운다고 합니다. 백주(白晝)는 그림자 한 점 없는 대낮을 말합니다. 한밤에 울어야 할 소쩍새가 지금 대낮부터 울어대고 있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대낮인데, 생물적 시간은 한밤중입니다. 주변이 얼마나 어두컴컴하기에 이러는 걸까요. 시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경이로운 구절입니다.

이처럼 세 구절에 걸쳐서 ‘신기로운 풍광’을 서술한 후 시인은 넷째 구절에서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시(始)’는 ‘비로소’로 새깁니다. 복거(卜居)는 본래 살 곳을 점친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시인이 ‘사는 곳’을 뜻합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시인은 세상의 혼란을 피해서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바깥세상에 아직 미련이 남아 이 궁벽한 곳까지 몰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과 다른 질서가 펼쳐지는 산속 세상을 긍정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마음의 움직임이 지극히 담박하여 새길수록 큰 울림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