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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지난달, 풍월당에서 강의했던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 일종의 ‘문학적 꼰대론’을 써 보았습니다. 강의를 위해 반복해서 작품을 읽다 보니, 사르트르가 평생에 걸쳐 싸웠던 삶의 실체, 이른바 부르주아적 삶에 깃든 역거운 허위의식의 실체가 조금은 들여다보이는 듯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

《중앙선데이》 편집이 바뀌어서 조금 손보았는데, 아래에 전문을 옮겨 둡니다.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40대가 넘으면 ‘경험의 직업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

『구토』에 나오는 구절이다. 더위를 피해 책을 끼고 나무 밑을 찾는다. 솔숲이 바람을 타고 소리를 운다. 투두둑 늙은 나무가 감꼭지 잃는 기척이 나고, 고양이가 호기심을 좇아서 마당을 달린다. 토요일 오후, 시골집의 한가함이 한결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생생하고 약동하는 지금 이 순간 앞에서 왕년의 경험은 얼마나 무력하고 추악한가. 눈으로 뚜렷이 보고 귀로 차분히 듣고 피부로 민감히 느끼고 마음으로 힘껏 얻으면 될 뿐, 옛날을 들추어 “삶을 마비와 반수면 속으로 끌고 들어갈” 까닭이 전혀 없다. 붙잡는 것 같지만 놓치는 것이고, 얻는 것 같지만 잃는 것이다. 인생의 각 순간은 불처럼 타오르고, 물처럼 흘러간다.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같은 순간은 전혀 없다. 

『구토』의 화자인 로캉탱은 경험을 내세워 타인을 제압하려 하는 인간을 경멸한다. 그들은 왼쪽을 건드리면 일화를 반복하고, 오른쪽을 만지면 충고를 쏟아낸다. “경험의 직업인.” 요즘에는 ‘꼰대’라고 부른다. 한때의 경험이나 얻어들은 소리에 붙잡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한심한 영혼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유지가 아니라 변화가 우리의 실존이다.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한번 살아버린 인생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란 얼마나 지옥인가. 그러나 오직 운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눈부신 상승과 아득한 전락이 겹쳐진 시간의 선 위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리라 용감히 나설 뿐, 대다수 사람들은 알량한 어제를 믿고 차라리 지옥을 견디는 쪽을 택한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게 반복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은 차이다. 차이와 반복 사이의 긴장이 삶의 실체를 이룬다. 반복이 없으면 두렵고, 차이가 없으면 지루하다. 공포와 권태 사이를 의식할 때, 인생은 한없이 흥미로워진다. 바디우의 말처럼, “우리에게 참된 가치를 갖는 모든 것은 지배적인 관념들을 평범하게 사용하거나 채택할 때가 아니라 세계의 진행 방향과 단절할 때 획득된다.”(『행복의 형이상학』)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고 ‘차이 없는 반복’을 계속한 인간은 ‘벌레’가 된다. 한 세기 전에 이미 카프카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벌레가 되는 게 낯선 일이 아님을 밝혔다. 우리는 모두 몸속에 벌레를 품은 변태다. 알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누구나 벌레로 떨어진다. 예민함을 견지함으로써 이 엄연한 사실을 경계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존재 이유다. 『나는 이 세상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서 시인 이영광은 말한다.

“포기가 습관이 된다고? 습관이야말로 포기다. 내일 할 일이 오늘 한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 다음 걸음이 이번 걸음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 다음 걸음에 대해 생각 안 해도 된다는 것, 그게 포기다.”

벌레란 습관에 사로잡혀서 생각을 잊어버린 인간이다. 제 처지를 잊은 채 인간의 온갖 일에 감과 배를 놓는 벌레가 ‘경험의 직업인’이다. 할례를 거행하는 사제처럼, 이들은 ‘아버지의 법’을 세워서 타자의 고유한 경험을 억압하고 감각의 중추를 거세하려 달려든다. 그 입을 거치고 나면, 세상 전체가 맥 빠지고 시시한 이야기로 바뀐다. 하찮고 사소한 점이라도 왕년과 비슷하면 완전히 똑같은 일로, 전혀 낯선 것은 무시해도 좋을 하찮은 존재로 치부한다. 한때의 영웅담을 빌미로 오늘날 자신의 무감각과 무능력과 무사유를 위선적으로 은폐한다. 사르트르는 문학과 철학과 행동을 통해 평생을 이들과 투쟁했다. 시인 역시 벌레와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

“강물의 달은 서너 자 앞에 떠 있고,/ 풍등(風燈)이 밤을 비추어 삼경에 이르려 하네./ 모래톱엔 웅크린 해오라기 조용히 자고,/ 이물에는 물고기 뛰며 철벅철벅 소리 울리네.”(江月去人只數尺, 風燈照夜欲三更. 沙頭宿鷺聯拳靜, 船尾跳魚撥剌鳴.) 이 시를 쓸 때 두보의 나이 쉰다섯 살. 전란에 시달린 몸은 병들고, 고향 떠난 마음은 그리움에 지쳐 있다. 문득 배를 띄워 강을 내려가다, 한밤중에 풍경 하나를 만난다.

낮게는 달이 강에 떠서 환하고, 높게는 풍등이 걸려 밤을 비춘다. 멀리 내다보면 해오라기가 모래톱에 몸을 웅크린 채 가만하고, 가까이에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면서 철벅철벅 소리를 낸다. 운치 있고 사랑스러운 풍경이다. 유랑자의 불안을 한 순간에 사그라뜨린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해오라기의 고요와 물고기의 역동이 빚어내는 숭고를 두보는 연권(聯拳)과 발랄(潑剌) 신생의 두 첩어로 완벽하게 압축한다. 발랄이라고, 그렇다, 두보의 이 말은 아직도 생기를 잃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이 고양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간은 거룩해지기도, 비루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경험의 직업인이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