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에 새 연재를 시작한다. 기존의 글을 단행본으로 마무리하는 작업도 마치지 못한 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는 게 많이 부담스럽지만, 송인서적 부도 이후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을 듣다 보니, 현장에서 또다시 지혜를 얻고 싶어졌다. 현대적 의미의 서점이 등장한 지, 벌써 100년을 훌쩍 넘었다. 방각본 책들을 사고팔던 조선시대 후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서점은 정보화의 거대한 쓰나미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만 보인다.
작년에 우리 곁에서 독립서점(기존 서점업계에서는 ‘트렌드서점’이라고 부른다) 열풍이 일어났고, 아직 그 열풍이 진행 중이지만, 이들만으로 ‘서점의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출판 현장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주로 저자만을 상대했던 만큼, 서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치사슬의 한 축이라는 측면에서 공부해 둔 바가 없지 않지만, 현장에서 치열하게 만들어지는 언어들을 갈무리할 만큼 충분했는지는 스스로 미심쩍다. 한편으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식으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서점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주로 방문하려는 곳들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존재해 온 서점들이다. 신선한 공간 구성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독자를 열광하게 만드는 독립서점도 소중하지만, 책들이 빼곡한 곳에서 출판문화의 정수를 형성해 온 노포들의 세월 역시 무척이나 귀중하다. 서점의 위기를 입에 달고 사는 요즈음, 수십 년 동안 서점 현장에서 독자들을 상대해 온 서점 운영의 마이스터에게서 누적된 경험을 얻고 싶다.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 체인서점 바깥에서 지역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서점의 미래를 떠올리고 싶다면, 이들에게서 우선해서 답을 얻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올 한 해는 ‘서점 편력자’로 전국을 떠돌면서 살아가리라.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짐한 글들을 옮겨 둔다.
‘백년 서점’을 찾아서
읽기 중독자들은 항상 마음속에 두 가지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서재’와 ‘서점’이다. 어쩌면 읽기 자체가 이런 공간적 취향을 만들어 내는 걸지도 모른다. 서재는 혼자 읽기 위한 공간이고, 서점은 같이 읽기 위한 공간이니까.
서재가 다만 책이 있는 공간이 아니듯이, 서점 역시 책을 사고파는 공간만은 아니다. 두 공간 모두 책을 온전히 체험하고 그로써 기억을 구축하는 공간이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란, 자기 주변의 모든 것과 나누는 역동적 상호작용 그 자체로, 그 작용이 일어난 시공간에서 분리된 후에는 서서히 희미해져 마침내 사라져 버린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도무지 막을 수 없으니, 인간은 오직 그 공간이 존재할 때에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마르쿠스 슈뢰르는 『공간, 장소, 경계』(에코리브르)에서 말했다. “공간과 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 저 너머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는 것이다. 이때 공간은 보존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듯 보인다.” 시간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공간은 우리를 보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곧바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하는 것을 뜻한다.
서가의 책들은 곧 우리 자신의 일부를 이룬다. 설사 구입해서 꽂아 두고는 하나도 읽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다. 책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체를 선명하게 기록한다. 그 완벽한 친밀성에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결박되어 있는지는 이사 등의 이유로 책과 헤어져야 할 때 확실히 알게 된다. 책을 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즉 자아를 다시 쓰는 것이기에, 우리는 며칠에 걸쳐서 하나하나 책을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책을 떠나보낼 수 있다.
서점은 책들의 저장소이자 자아의 저장소이다. 서점에서 우리는 책을 사고팔 뿐만 아니라, 책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자아를 구성한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전적으로 책에만 몰입할 수 있다. 책을 보고 만지고 읽고 생각하는 실천을 한없이 반복하면서 우리 자아의 주파수를 송신하고 타자의 목소리를 수신하면서, 합치의 어느 순간을 찾는다. 공명하는 책과 마주쳐서 자아를 새롭게 시험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희열에 속한다. 자기 안에 붙잡혀 있던 자아가 타자를 향해 열리면서 세계가 해방되는 기쁨이 거기에서 솟아난다.
서점 체험은 유난한 깊이를 가진다. 책과의 만남은 우리 자신을 해방하면서 고쳐 쓰는 과정에 해당하므로, 서점 공간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아주 유난할 정도다. 사랑하는 이를 만난 장소를 도저히 잊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단골 서점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무수한 나를 기록해 두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서점 하나를 만나는 일은 자아를 새롭게 세우는 일이고, 서점 하나를 잃는 일은 자아를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점 공간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이러한 원론의 호소만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서점 현실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세상을 이끌어 가는 기본적인 법칙이 달라진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정보 혁명의 물결이 휩쓸고 있다. 제임스 글릭이 『인포메이션』에서 잘 정리한 것처럼, 세계의 기본 단위는 이제 비트(bit)가 되었으며,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트를 통해서 바라볼 때 가장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보의 침투에 따라서 기존 세계의 낡은 법칙이 다시 구축되는 것을 ‘정보화’라고 부른다. 정보화 혁명은 세계 전체로 파급되어 한계에 이를 때까지 무한정 계속되므로, 출판이든, 서점이든, 책이든 간에, 정보의 법칙이 적용되는 데 예외로 남을 방법은 없다.
배리 웰먼의 『새로운 사회 운영 시스템 ―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에이콘출판, 2014)에 따르면, 정보화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장소 대 장소’에서 ‘개인 대 개인’으로 이동하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보화란 한 사람이 물리적 시공간에 결박되지 않는 자유를 얻어서,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는 고정된 장소에 근거를 두는 사회관계(강한 연결)를 해체하고, 이를 자유로운 연결(약한 연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관계로 끝없이 재구축한다. 이 흐름은 현재로서는 또 다른 물리 법칙이 제시되지 않는 한 비가역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동안 아무리 소중했던 곳이라도, 물리적 장소성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을 더 이상 붙잡아 두지 못한다. 정보에 기반을 둔 채 책과 인간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사이버 서점의 등장과 확산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그 결과는 물리적 공간성에만 의존하던 서점들을 스무 해도 되기 전에 궤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1995년 TV에 서른한 살 청년이 나와 짐승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기가 인터넷 책 쇼핑몰을 만들어 전 세계 소비자들이 가장 저렴하게 책을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때만 해도 ‘저런 바보 같은 놈, 책을 인터넷으로 팔다니. 세계 출판의 수도인 뉴욕에 책 가게가 100개도 넘는데 무슨 인터넷 책방이야? 책이란 게 만져보고 읽어보고 냄새도 맡고 사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뉴욕의 책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유명한 스트랜드 북스토어와 반스 앤드 노블 3개만 남았다. 동네 가게는 매년 망하고 있다.
지난 주말 《조선일보》에 실린 음악가 한대수의 에세이 한 대목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 서점이 고작 네 군데일 리는 없다. 당연히 예술가 특유의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주변에서 서점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책으로 밥을 먹고사는 이들한테 이 사실은 희망도 없이 밀림 속을 헤매는 악몽에 가깝다. 게다가 그 실체가 꿈이 아니라 현실인 만큼, 벗어날 방법조차 막막할 뿐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이 다르지 않다. 사이버 서점이 들어선 후 도서정가제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아주 빠른 속도로 물리적 서점이 사라져 갔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발행하는 『2016년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국내의 서점 숫자는 1994년에는 5683군데였으나 2005년 2103군데로 50% 넘게 줄었고, 다시 2015년에는 1559군데로 2005년에 비해 25%가량 더 줄어들었다. 독자와 책이 만나는 공간인 서점의 위기는 곧바로 출판의 위기로 이어진다. 물리적 서점이 사라지면서 서점 공간 내 진열에 주로 의존해 온 책의 발견성이 떨어지고, 책의 마케팅을 둘러싼 구조가 크게 변하면서 출판산업의 전통적 가치 사슬이 붕괴될 위기에 놓여 있다.
2014년 11월, 도서정가제가 어느 정도 강화된 형태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존 물리적 서점의 폐업이 서서히 감소하고, 대형 서점 체인들이 경쟁적으로 지점을 개설하고, 이른바 독립 서점이 곳곳에 생겨나는 등 물리적 서점의 존립은 연착륙 구조에 들어갔다.
독립 서점을 다룬 인터뷰와 책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관련 논의들이 풍성해지는 것은 긍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나치게 트렌디한 서점 쪽으로 쏠리는 현상도 무척 뚜렷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일부러 서점 공간을 찾도록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짜 내는 이들 새로운 형태의 서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들의 활약에 얼마나 많은 독자가 다시 서점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또한 기존 서점에 자극을 주어 서점 업계 전반에 혁신의 물결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 한 해만 해도 창업 유행을 타고 수십 곳이 생기는 등 들불처럼 일어서기는 했으되 조만간 불어올 작은 비바람에 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무척이나 크다. 게다가 올해 초 송인서적이 부도를 낸 후, 여러 가지 이유 탓에 물리적 서점의 위축이 다시 뚜렷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서정가제 강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진정시켜 놓은 물리적 서점의 위기를 더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은 없을까. 서점이란 우리에게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른바 독립서점들은 서점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지속되는 위기에 대하여 서점 사람들은 혹시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답이 있다면 누구한테 물어보고, 그것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혹시 미래의 서점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미래의 서점이 장소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구비하거나 특별 이벤트를 끝도 없이 생성하는 일과 같은 일일까. 이것이 정말로 ‘서점의 근본’일까. 차라리 일본 진보초의 터줏대감인 시바타 신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솔직한 것은 아닐까.
나는 서점의 근본을 전하고 싶어. (중략) 예를 들면, ‘책은 무겁다’ 같은 이야기지. (중략) 우선은 내 눈앞에 있는 책의 산을 무너뜨리는 게 매일 아침 서점이 해야 할 절대적인 일이지. 그걸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 그러니 그걸 다 풀어헤쳐 무거운 책을 안고 매장을 동분서주해야 해. 최선을 다해 궁리하고 책을 진열하지만 그렇다고 팔린다는 보장은 없어. 팔린다고 해도 큰 이익이 남지도 않지. 어떤 작업을 해도 크게 칭찬받지도 못하고 성과도 조금밖에 없어. 하지만 이것이 일상이지.
편집자 생활을 오래 했지만, 나는 서점은 잘 모른다. 책을 만들어 독자들한테 전달하는 일에는 서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데도, 서점의 어려운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둔 적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것은 틀림없이 일종의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죄를 갚기 위해서 오랫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점 현장을 지켜 오고, 앞으로 서점의 미래를 만들어 갈 노포들의 이야기에 우선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고된 노동을 통해 ‘서점의 근본’을 일구어 왔다. 이들이 일상에서 건져 올린 노하우야말로 서점 현실을 말할 때 놓칠 수 없는 운영의 지혜이고, 고민하면서 꺼내 놓은 하나하나의 시도야말로 서점의 미래를 만드는 비법일 것이다. 오늘날 서점은 혁신 없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노련한 경험을 우리의 디딤돌로 삼지 않는 한, 서점의 백년을 이야기할 수 없고, ‘백년 서점’을 가질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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