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박맹호 회장님 추모사를 실었습니다. 부음을 듣고 홀로 망연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그룹인 민음사의 출판원리입니다. 아마도 회장님께서 이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라는 것 같았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새벽에 부음을 듣고, 가슴속 등불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물다섯 살에 어린 나이로 박맹호 회장을 만나 스무 해 넘도록 곁에서 책을 배우고, 편집자의 길을 익히고, 출판의 세상을 경험했다.
말년 휴가를 나와 면접에 간 날이 마치 어제 같다.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첫마디는 대뜸 “언제 출근할 거냐?”였다. 엉겁결에 제대 다음 주라고 해버렸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눈빛의 형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대답이 내 운명이었고, 그 눈빛은 그대로 내 삶의 별이 되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 동안 민음사는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그룹이 되었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두려운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막막한 어둠을 만나서 새로운 길로 들어설 때마다, 당신은 지도가 되어 갈 길을 잡아주었고 항상 과감한 용기를 격려했다.
“출판은 영원한 벤처야.”
당신은 한 번도 불황을 변명하지 않았고, 새로운 모험에 항상 나설 것을 촉구했다. 힘들 때에는 사재를 털어서라도 작가들의 어려움을 지원하도록 했고, 넉넉할 때에는 세계문학전집 같은 장기 투자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큰 그림을 상의하고 일을 맡긴 후엔, 무슨 책을 내고 말지에 대한 사전상의를 바라지 않았다. 편집자의 자율이 최대한 보장되었고, 그로부터 다양한 기회가 만들어졌다. 당신은 표지가 완성되어 책이 나올 무렵에야 비로소 “이 책을 꼭 내야만 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예상치 못했던 성공을 함께 기뻐했고, 쓰디쓴 실패를 위로의 재료로 삼았다.
“이 원고, 한번 검토해 보게.”
지인이 찾아오거나 원고를 보내왔을 때에는 조용히 불러서 저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출간 여부를 편집자들이 결정하게 했고, 편집부 내부의 논의 결과가 존중받지 못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신이 예감하는 책을 반드시 편집하도록 했는데, 그럴 때면 항상 이 책은 당신이 책임질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당신의 안목을 따라잡지 못한 게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당신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곁에 있는 이들이 나이 들도록 버려두지도 않았다. 언제나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하면서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애로를 들었다. 편집자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곧바로 채택해 출판할 기회를 주었다. 팔순의 나이에도 항상 새로운 세대의 소설을 읽고, 최신 영화와 드라마와 뮤지컬을 챙겨서 즐겼다. 작품에 감명을 받으면 새벽같이 나와 직원들 출근을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의견을 묻곤 했다. 지상에 숨결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내일은 당신과 ‘도깨비’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반 발짝만 앞서가게.”
당신은 ‘변화의 신’과 같았다. 사람이 태어나 한 차례 업적도 이루기 어려운데, 당신은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 방에서 출판을 시작한 후, 시대의 고비마다 번번이 금자탑을 이루었다. 세상의 흐름을 항상 남들보다 빨리 감지했으며, 책을 통해서 인간을 고취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계몽의 소명을 잃지 않았다. 당신의 출판은 항상 민첩했으나, 우리한테 현실에서 두 발을 모두 떼지 말 것을 부단히 강조했다.
‘세계시인선’과 ‘오늘의 시인총서’와 ‘김수영 문학상’을 통해 ‘시의 시대’를 열어젖혔고, ‘오늘의 작가상’과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문학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새로운 작가들이, ‘대우학술총서’를 통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예의 인문학자들이 세상에 쏟아지게 했다. 단행본 본문 편집에 가로쓰기를 도입해 편집문화를 혁신했으며, 북 디자인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려고 늘 애썼다. 1990년대 이후에는 책만 읽으면 누구나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교양을 갖출 수 있도록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했다. 비룡소,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등 자회사를 통해서 어린이책, 장르픽션, 과학책 시장을 열었는데, 이 모든 것이 오늘날 한국출판의 기름진 밭이 되었다.
작가는 책으로 불멸을 꿈꾼다. 살아생전 당신은 수많은 작가들에게 그 기회를 베풀었다. 이제 당신이 돌려받을 차례다. 누군가 출판으로 불멸을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당신의 이름이 거기에 가장 가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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