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월 5일) 차기정부 출판산업 진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의 사회를 맡아서 진행했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김민기, 유은혜, 소병훈이 주최하고, 여러 출판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학습자료협회,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한국아동출판협회, 한국학술출판협회 등이 공동으로 주관한 행사였다.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렸는데, 이런 대규모 공적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경험은 별로 없어서 불의의 사단이 있을까 해서 조금은 긴장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마친 듯하다.
지난 1월 돌아가신 민음사의 박맹호 회장께서는 “책은 인간의 DNA”라고 한 바 있다. 책에 간직된 인류 정신의 정화야말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물려받고 물려주어야 하는 영원한 자산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인류의 DNA는 너무나 위축되어 있다. 최근 독일의 시장조사기관인 게에프카(GfK)에서 전 세계 열일곱 나라를 대상으로 국민 독서율 조사를 했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국과 중국,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신흥 국가들이 모두 포함된 대규모 조사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불행히도 한국은 네덜란드와 함께 비독자가 가장 많은 나라였다. 2017년 현재, 한국은 주요 국가에서 가장 책을 읽지 않는 나라로 드러난 것이다. 정말 창피하다.
독서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다. “문학·출판·서점‧도서관·독서‧교육 관련 단체들”은 오늘날 한국이 맞이한 독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목소리를 함께 모아서 “제19대 대통령 후보 공약 제안”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책을 읽는 시민의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일은 국가와 사회의 엄중한 책임”이라고 하면서, “문학 창작의 활성화, 출판문화 진흥, 도서관 인프라의 확충과 서비스 질의 개선, 독서 생활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어제 열린 토론회는 출판계의 애타는 호소를 이어받아 독서를 살리고 창작을 진흥하며 출판을 활성화하는 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주제는 하나로 집약된다. “책 읽는 대통령이 보고 싶다”는 호소는 “책 읽는 시민을 보고 싶다”는 호소와 같은 말이며,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책 읽는 대한민국을 위한 환경 조성”에 앞장서 달라고 한 것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대대표가 와서 축사를 하면서 출판 관련 진흥기구의 실질화, 출판 예산의 확충, 유통 난맥상 해결, 법제 정리 등을 약속한 것이 귀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본 발제에 앞서 도종환 의원과 유은혜 의원 등이 모두 발언을 했다.
도종환 의원은 출판-도서관-창작이 하나로 연계되어 출판산업 전체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도서관 3000군데 증설을 바라는 출판계의 여망을 수용해서 우선적으로 다음 정부 5년 동안 1500군데까지 도서관을 늘리고 예산을 확충할 수 있도록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작가들의 창작권을 보장해야 하며, 블랙리스트 같은 사회적 배제가 다시는 작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유은혜 의원은 독서가 문화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출판 진흥 정책의 기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책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창의성을 살리자면서,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조직, 직무, 사업에 대한 총체적 점검과 진단을 통해서 민관 협치가 가능하도록 민간의 전문성이 반영되는 구조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입법과 제도적 뒷받침을 국회가 하겠다고 말했다.
김민기 의원은 출판산업의 위기를 실감하며 출판기금이 마련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며, 소병훈 의원은 오랫동안 출판사를 운영해 본 분답게, 원시적인 유통 문제를 개선하는 데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토론회의 발제는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 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대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이민호 교수 세 분께서 맡았다. 정우영 시인,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안찬수 사무처장, 한국출판인회의 김한청 기획정책위원장, 대한출판문화협회 박효상 유통담당 상무이사, 서울서점조합 정성훈 대외협력위원장, 언론노조 박세중 출판노협 의장이 했다.
‘독서력과 시민의 품격’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장대익 교수의 발표가 인상적이었다. 최신 과학의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고, 인간은 사회적 학습자로서 존재하며, 느린 사고야말로 인간 사고의 중요한 특징임을 환기시킨 후, 독서가 인류 사회를 지속시키는 문명의 엔진이고, 자신만의 통찰을 이끌어 내는 창의성의 원천이며, 타자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하나 하고 싶다.
백원근 대표의 발제는 ‘출판문화진흥정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는데, 독서율 감소 및 가계 월평균 도서구입비 감소로 드러난 출판시장의 위기를 엄숙히 언급했다. 아울러 정부 예산은 증가하고 있지만 정부 예산에서 출판 관련 예산의 비중은 나날이 줄어드는 현실을 날카롭게 이야기한 후, 정부의 출판진흥정책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 5개년 계획이 인프라 구축에 무관심한 나열식 정책일 뿐 실질적 집행의지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조직 개편을 요구한 후, 책 생태계 전체를 키우고 발전시키는 인프라 조성을 위해 프랑스와 같이 출판, 도서관, 독서 정책 부서를 하나로 합친 융합형 행정 체계로 ‘독서출판국’ 신설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도서관 도서구입비 확충, 완전한 도서정가제 시행,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출판 성장동력 발굴, 비독자를 독자로 만드는 독서 정책 혁신을 요구했다.
이민호 교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 독서사고 표현과 책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이미 우리 현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제4차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해서, 지금까지의 산업화 과정은 기계와 시인이 함께 이루어 왔음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아울러 차기 정부의 리더십이 지난 정부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로 인한 인간의 위기를 성찰할 수 있는 덕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시적인 부분을 통찰하고 이를 진흥하는 것이 차기 정부의 출판문화 정책의 밑바탕이며, 출판산업이 집중해야 할 본질이라고도 했다. 흔히 잊기 쉬운 출판문화 정책의 정신적 측면을 잘 짚어 준 발표였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독자여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후에도 지정 토론을 비롯하여 2시간가량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넓은 세미나실을 가득 메울 만큼 출판 관계자들의 참여 열기가 대단했다. 차기 정부에서 획기적인 출판 진흥 정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직(職) > 책 세상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문학 독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3) | 2017.04.16 |
---|---|
문고본은 ‘작은 책’이 아니다 (0) | 2017.04.11 |
[서점의 미래를 찾아서] ‘백년 서점’을 꿈꾸다 (1) | 2017.03.14 |
송인서적 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1) | 2017.01.26 |
출판은 영원한 벤처야(박맹호 회장 추모사) (0) | 201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