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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큐레이션과 서점의 진화

《기획회의》 450호(2017.10.20.)의 이슈는 “스타 점원의 시대”입니다. 이 이슈에 대해서 쓴 ‘여는 글’을 조금 보충해서 아래에 옮겨 둡니다. 《기획회의》에는 ‘오늘날의 서점은 경험을 판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큐레이션과 서점의 진화


“단단한 모든 것은 공중으로 사라진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다. 자본은 해방이다. 자본은 세상의 모든 것을 화폐로 환산함으로써 혈연이나 계급이나 신분이나 토지와 같은 낡은 봉건 질서의 가치를 완전히 분해해 버린다. 

사랑이나 우정과 같이 도무지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것까지 계산하려는 자본의 폐해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세상의 본질은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고 변화이며, 변화를 반영하고 가속화하는 자본의 운동 앞에서 단단하고 고정된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초연결사회 역시 자본의 운동과 정보기술 등 다른 사회적 힘들이 만나서 때로는 화합하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우발적으로 이룩되었다. 자본이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가는 이 사회에서 장소에 기반을 둔 모든 관계는 약해진다. 

장소는 부동성 또는 고정성이다. 자본의 운동은 공간을 물렁물렁하게 만든다. 서점 판매대의 변화를 살펴보자. 과거에는 판매대 대부분이 고정된 상태로 일정하게 구획되어 있었다. 입고될 때 책의 자리가 한번 정해지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자리에도 동시에 진열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한국문학, 외국문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십진분류법에 따라 분류되어 책들은 고정되고, 거기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서점 공간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자본의 운동이 복합이나 융합으로까지 흘러가면서, 기존의 낡은 구획들 ‘사이’에 수많은 학문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인문학과 자기계발 사이에, 역사와 여행 사이에, 사회학과 물리학 사이에…… 때로는 여러 학문이 하나로 뭉쳐서 새로운 몸을 이룬다.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기기묘묘한 학과 이름은 대학이 자본의 운동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서점이라고 다를까. 가령, 화제가 되고 있는 김재인의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라는 책은 어디에 둘 것인가. 인공지능에 관심 있는 과학 독자도, 철학에 관심 있는 인문 독자도, 미래를 고민하는 직장인들도, 아이 때문에 애를 끓는 학부모들도 찾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대에 서점이 판매대 전체를 고정해 두는 것은 거의 자살에 가깝다. 자본의 운동 자체를 아예 거부할 게 아니라면, 유동하는 세계에 맞추어 판매대도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서점 자체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공간을 차지하고 책을 가득 채워 두면, 거의 자동으로 일정한 독자가 생겨나고, 필요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초연결사회에서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물렁물렁한 사회에서는 공간 자체에 대한 애착은 아주 약해진다. 이제 독자들은 서점 자체(고정성)에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서점이 주는 경험(유동성)에 매력을 느낀다. 서점은 그 경험을 최적화하는 공간일 뿐이다. 

요즈음 큐레이션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큐레이션이란 무엇인가. 독자의 욕구에 맞추어 좋은 책을 선별해서 제시하는 행위로 흔히 정의한다. 하지만 이 일을 단지 분류라고 이해한다면, 물밑의 거대한 흐름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을 좇는 하수의 반응에 불과하다. 

큐레이션이란 유동하는 사회에 맞추어 서적을 분류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서점 자체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하는 일이다. 

따라서 큐레이션은 책을 고정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고, 책을 도구상자로 삼아서 독자와 책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끝없이 창조하는 모험에 가깝다. 이 일에 짜릿한 기쁨과 무한한 열정을 느끼는 사람만이 아마도 미래의 책방 일꾼일 것이다.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지적 역량도 요구된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축적된 지식, 트렌드를 재빨린 붙잡는 순발력은 물론이고,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갖추지 않으면, 큐레이션을 통해 서가를 유연하게 운영하고 독자에게 매력적인 경험을 연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스타 서점원’이란 누군가 창조적으로 이 일을 해내고 독자를 열광시킬 때, 나중에 얻을 수 있는 영예의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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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집에 기고한 다른 글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서점인의 매력이 책 생태계를 키운다 /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서점원, 보듬고 위로하고 지역을 만드는 스토리메이커 / 정도선 (청주 꿈꾸는책방 큐레이터)

동네서점의 부흥 뒤에는 사람이 있다 / 김종원 (51페이지 대표)

책과 출판, 독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서점인/ 천정한 (도서출판 정한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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