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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문고본은 ‘작은 책’이 아니다



문고본은 ‘작은 책’이 아니다

_ 인간과 책이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



“책의 세상 자체는 충분히 혁신적이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미디어이지만, 그래서 아무런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 같지만, 출판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책의 혁신이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출판의 위대한 선배들은 다른 분야에서 이룩한 첨단 기술을 수용함으로써 책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모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판의 혁신은 대부분 내용과는 별 관련이 없다. 출판의 위기가 일상화되면서, 참신한 콘텐츠와 새로운 기획의 출현을 중요한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는 콘텐츠는 항상 열광을 불러오므로, 하루를 살아가는 개별 출판사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그다지 잘못된 이야기만도 아니다. 그러나 출판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인간과 책이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쪽이 더욱 커다란 가능성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이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 리더십이다.

독자들의 읽기 습관이 낭독에서 묵독으로 옮겨가자, 편집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구두점을 개발하고 띄어쓰기를 적용하고 장절 체재를 발명한다.(물론 이는 선후를 따지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또한 이를 적용할 수 있도록 많은 투자를 감행해 활자를 개발하고 조판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2절판 크기의 책 크기를 줄여서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손 안의 책’으로 바꾸어 나가면서 개인이 혼자서 눈만으로도 읽기 편하도록 책 자체를 혁신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워지자 개인의 머릿속이 국가와 종교의 감시로부터 작은 자유를 얻고, 그러한 자유가 빚어 낸 새로운 생각들을 기록하고 교환하는 사회가 나타난다. 지동설이 출현하고 종교개혁이 선포되며 계몽사상이 움튼다. 맥루언의 말처럼, 미디어가 메시지를 만든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날짜를 고정하고, 평일을 휴일로 만든 것은 자본의 운동이었다. 생산력의 꾸준한 발전에 따라 물건이 넘쳐흐르자 선물이라는 형태로 대규모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성탄절에 선물을 교환했던 게 아니다. 따라서 선물을 교환하려고 성탄절을 휴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하리라. 

‘선물 교환’이라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때로는 훌륭한 선물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다양한 연령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만족하는 데다 주는 사람의 문화적 자부까지 담을 수 있기에 책이야말로 선물에 가장 적합하다. 이 사실을 꿰뚫어보고, 성탄절을 휴일로 정하는 데 앞장선 것이 서양의 선배 출판인들이다. 그 결과, 지금 전 세계에서는 독자들의 구매 습관이 형성된 성탄절 무렵에, 겨울 시즌의 화제작을 출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돈 없는 사람에게 우선 책을 공급하고, 대금은 분할해 갚도록 하는 할부제도를 만들어 냄으로써 출판은 신용경제를 사회 전반에 선구적으로 도입했다. 책을 읽는 독자를 믿고 물건을 미리 건네는 식으로 과감히 사업을 전개한 출판의 모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블록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신용 혁명은 상당히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양성 문제는 다소 초래했을지라도 전집류 같은 초대형 기획의 출현과 독자의 비약적 확장, 그리고 출판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따른 산업의 발전이 이룩되었다. 

문고본은 또 어떤가. 출판에서 문고본은 박리다매라는 형태로 나타난 기획 혁명이자 책의 판매 장소가 서점을 넘어서 백화점, 슈퍼마켓, 잡화점으로까지 확대되는 공간 혁명이기도 하다. 단순히 기존에 있던 책의 판형을 줄이고 가격을 낮추는 ‘작은 책’이 아닌 것이다. 문고본은 혁명이지만 작은 책은 기획에 불과하다. 문고본은 인간과 책이 만나는 방법을 바꾸었지만, 작은 책은 설령 판매를 가져온 반짝이는 아이디어일지라도 같은 시장 안에서 점유율을 경쟁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미디어 환경에 전반적 문제가 없을 때에는 콘텐츠 혁신과 같은 자잘한 개선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출판 미디어 자체의 위축이 염려되는 상황에서는 출판 자체를 혁신하는 쪽이 차라리 낫다. 혁신이 이루어질 경우, 출판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과실은 새로운 필자 집단의 대규모 출현과 독자의 비약적 확장일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해 출판을 혁신해 보려고, 전 세계 출판계에서는 꾸준한 시도를 행하고 있다. 출판인들이 이를 들여다보면서 많은 영감과 시도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