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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아니시 카푸어(Anish Kapoor) 전시회를 다녀와서



가을 들어 미술을 하고 싶어 하는 딸과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미술관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오늘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아니쉬 카푸어 전시회」에 다녀왔다.(Anish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아니쉬가 아니라 아니시가 맞다. 외국 인명이나 지명, 상품명 등은 이런 큰 전시회를 열려면 한 번쯤 국립국어원에 자문해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학원 갔다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다가 오후에 잠깐 다녀왔는데, 딸이 헤헤 웃으면서 함께 어울려 주어서 기분이 괜히 뿌듯했다.


전시장 입구에 선 딸내미. 얼굴은 노출 금지!!!


리움 미술관 특별 전시실 두 층과 야외를 가득 메운 아니시 카푸어(Anish Kapoor, 1954~ )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최근에 본 전시 중 가장 놀라운 체험이었다. 작품을 이루는 물질의 성질 자체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깃들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들은 물질과 비물질,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 유한과 무한, 시공간과 (무)의식, 정지와 운동이 겹쳐진 현묘(玄妙)의 세계를 창조한다. 



「동굴(Cave)」(2012)


지하 전시장 입구에 놓인 「동굴(Cave)」(2012)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구조물로 거대한 호박이 가느다란 나무 막대 하나로 받쳐져 놓인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위태로운 균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래쪽에 뻥 뚫린 공간에 고개를 들이밀면 쏟아져 내리는 칠흑이 창조 이전의 흑암(黑暗)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한 어둠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리셋한다. 이 절대 어둠은 전시장 속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나는 이 작품들을 보는 와중에 머릿속 한구석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검은 점이 찍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래의 「무제(Untitled)」(1990)와 「땅(The Earth)」(1991)은 그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 작가의 오랜 탐구 주제 중 하나임을 보여 준다.


「무제(Untitled)」(1990)



「땅(The Earth)」(1991)


이 두 작품에서 섬유 유리와 안료를 이용해 만든 이 절대 어둠의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안내 팸플릿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부터 아니시 카푸어는 ‘보이드(Void)’ 연작을 만들어 왔다. 이 연작을 통해 그는 무(無)로서의 공(空)이 아니라 유(有)로서의 공, 그러니까 충만한 공(空)이라는 동양적 사유의 정수를 물질화하는데 성공한다. 인도의 전통적 색감을 살린 가늘고 미세한 안료 가루와 그와 함께 공존하는 섬유 유리라는 현대적 재질이 어떤 화학 작용을 빚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입구는 좁고 작았지만 내부 공간은 영혼 전체를 포근히 감싸면서 빨아들여 마치 무저갱처럼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한 기자가 인용한 니체의 말처럼, “당신이 심연을 응시할 때, 심연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 절대 검정 바로 곁에 색깔이 있다. 공(空)이 색(色)을 만들어 냈으니, 색은 곧 공이요 공은 즉 색일 것이다. 「붉은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To Reflect an Intimate Part of the Red)」(1981)와 「노랑(Yellow)」(1999), 「나의 몸 너의 몸(My Body Your Body)」(1999), 「내가 임신했을 때(When I am Pregnant)」(1992)는, 강렬한 색깔을 담은 오브제를 통해 작품과 그 작품이 기대고 있는 바닥이나 벽 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고, 우리에게 인식론적 충격을 준다.



「붉은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To Reflect an Intimate Part of the Red)」(1981)



「내가 임신했을 때(When I am Pregnant)」(1992)



「노랑(Yellow)」(1999)



「나의 몸 너의 몸(My Body Your Body)」(1999)



「나의 붉은 모국」(2003)은 영어 원제가 My Red Homeland인데, 어쩐지 Homeland를 ‘모국’보다는 말 그대로 ‘고향땅’으로 옮기고 싶다. 엄청난 크기의 붉은색 왁스 더미가 쌓여 있고, 그 위를 거대한 해머가 1시간에 한 바퀴씩 회전한다. 작품은 끝없이 변화하면서도 제 형태를 잃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 파괴와 창조, 유한과 무한이 교차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영원한 원천인 대지 너머 자궁까지 떠올리게 한다. 



「나의 붉은 모국(My Red Homeland)」(2003)


「나의 붉은 모국」(2003), 회전하는 거대한 해머.


마지막으로 거울이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용해 조각의 표면을 반영과 환각의 공간으로 연출함으로써 아니시 카푸어는 물질과 비물질, 현실과 환상, 존재와 비존재,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무화시킨다. 물아일여(物我一如)라고 할까. 사물과 자아 사이의 틈, 작가와 관객 사이의 공간, 대상과 이야기 사이의 괴리를 붕괴시킨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빛이든, 어둠이든 무엇이라도 반짝이는 표면 가까이 이르는 순간, 작품의 일부로 포획되는 작품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동시에 작품은 더 이상 고유한 실체를 잃고 자신이 반영하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작가의 말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리움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세 작품 「현기증(Vertigo)」(2006), 「하늘 거울(Sky Mirror)」(2009),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2009)는 이러한 작가의 세계를 잘 드러낸다.


「현기증(Vertigo)」(2006)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2009)



「하늘 거울(Sky Mirror)」(2009)


나는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을 오랫동안 실물로 보게 되기를 바라왔는데, 이번에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고 꽤 감격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장르나 도구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 낡은 장르나 도구로는 그의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새로운 세계를 결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시 카푸어의 색(色, 안료)과 그로써 빚어낸 공(空)은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는 길에 딸한테 전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다. 언젠가 딸이 읽기를 바라면서 블로그에나마 적어 둔다.


리움 미술관 거대한 현수막 아래 선 딸. 역시 얼굴 노출 금지닷!!!



============================ 이번 방한 인터뷰에서 한 아니시 카푸어의 말들 모음 =================================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지를.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전부인지를. 물론 과학적인 답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론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철학적인 답을 찾는 것이다. 내 작업도 그 일환이다.


인생이란 신비롭고 혼란스럽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을 쫓다 보면 누구나 종교적이게 된다. 예술가들 또한 모두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에게 어떤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술은 항상 신비로워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학교에 가서 좋은 국민이 돼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특정한 행동 양식을 따른다. 예술가는 이런 특정한 방식을 따르는 걸 거부해야 한다.작업실에 들어서면 나는 여성도 됐다가 남성이 되기도 하고 어린애가 됐다가 바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샤머니즘적 변형이 예술가의 자유이다.모든 일이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작업실인데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의미 없어 보이는 그런 작업이 나중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예술가의 역할은 아이디어를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오브제가 가능성을 제안하고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러티브가 창출된다.


서양의 일부 예술가들처럼 동양적 요소를 갖다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非)서구인으로서 내가 아는 것이고 내 철학과 문화의 일부이지 그 이외의 다른 변명은 필요하지 않다.


예술가로서 나는 항상 안료에 자극받아 왔다. 안료는 물질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정신적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환상이기도 하다. 그건 오브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브제가 아니기도 하다.


나의 작업은 때때로 여성작가의 작업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런데 그 같은 오해가 별로 싫지 않다. 창조와 에너지의 근원인 모성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비우면 비울수록 더 많은 것이 담긴다. 비운다는 것은 곧 채우는 것이다.


예술가가 작품의 계획이나 아젠다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질이 어떤 상태를 가지는가를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질문을 계속 탐구할 뿐이다.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국면, 그게 진짜 예술의 시작이다.


수년간 내 관심사는 물질과 비물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형태와 비(非)형태였다. '꿈의 오브제' '상상의 오브제'를 나는 오랫동안 탐구해 왔다. 


나는 물질을 물질로 바라보는 기존의 오브제 작업을 넘어서려 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속성과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속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싶다.


나는 '보이는 것' 너머에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표현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물질을 비추는 반사(reflection)에 관심이 많다.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에서부터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에 이르기까지 반사를 주제로 한 작품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 볼록 거울을 사용한다. 난 오목 거울을 주로 사용한다. 볼록 거울이 위장 효과를 가진다고 한다면 오목 거울은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 중에 음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거울 자체로 머물지 않고 거울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간을 가득 채운 어둠처럼, 거울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 독특하다. 


나는 몸과 관련된 철학적인 뭔가를 보여 주려 한다. 관람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사물이 발견되길 바란다. 


우리 몸 안에는 비물질적인 속성이 있다. 사람들은 바로 이 부분을 영적 동력이라고 한다. 예술을 통해 숭고한 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