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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후한서

[후한서 이야기] 조조의 도굴

동아일보》에 강인욱 선생의 연재 기고 도굴 당한 도굴 왕조조의 무덤헛된 욕망의 쳇바퀴」에 조조의 도굴 이야기가 실렸다. 유명한 일화다. 

도굴이 기승을 부리게 된 시점은 국가가 등장하고 왕이나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무덤에 수많은 보물을 넣어 저세상에서도 영화를 이어가고자 하면서부터다. 보물을 묻은 화려한 무덤이 많아지면서 무덤 속 보물을 탐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삼국지의 간웅(奸雄) 조조는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도굴의 왕으로 꼽힌다. 중국 사서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가 전쟁할 때 조조가 무덤을 파헤치는 부대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보물을 긁어모으는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이 기원전 2세기 살았던 한나라 왕족인 양효왕(梁孝王)을 비롯해 여러 무덤을 도굴해 군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그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유물을 털었는지는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름 없는 무덤이 아니라 대놓고 한나라 왕족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로 조조의 도굴은 무척이나 체계적이었으니 최초의 ‘전문적인 도굴 전문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1001/109502677/1

 

인용된 근거는 원소전(袁紹傳)」에 나온다. 원소와 조조가 붙은 관도대전(200년)이 일어났을 때, 원소 쪽에 가담했던 당대의 문장가 진림(陳琳)이 원소를 위해서 쓴 격문이다. 하지만 정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원소 쪽 입장에서 적수 조조를 토벌해야 할 이유가 담긴 격문에서 유래한 만큼, 일종의 문학적 과장으로 보인다. 

아래의 글 중 조조가 몸소 지휘해서 양효왕의 무덤을 파헤친 일은 사실인 듯하다. 강 선생 말대로, 군자금 마련이 이유였을 것이다. 또 진림의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 조숭의 복수를 하고자 서주에서 도겸을 정벌했을 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죽이고 큰 무덤을 모조리 파헤친 일은 역사적 사실이다. 

후한 말, 최악의 도굴꾼은 조조가 아니라 동탁이다. 동탁은 군대를 보내 낙양 주변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파헤쳐 보물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정사에 기록된 바로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전폐제(前廢帝) 유자업(劉子業) 때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을 두고 건안왕(建安王) 유휴인(休仁)에게 임무를 맡긴 일이 유일하다. 남사(南史)』 「송본기(宋本紀)에 이 일이 나온다.

 

“황제는 어렸을 때 책 읽기를 좋아해 옛 일을 잘 알았고, 문장에 재능이 있어 몸소 효무제뢰(孝武帝誄)」 및 잡된 글을 몇 편 지었는데, 때때로 뽑을 만한 문장이 있었다. 위나라 무제(조조)가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模金校位)를 두었기에, 황제는 두 관직을 설치해서 건안왕 유휴인,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에게 거느리게 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열전에도 나누어 나타난다.” 

 

 

 

 

아래에 진림의 격문 「원소를 위해 예주에 부친 격문(爲袁紹檄豫州)」 전체를 번역해서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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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현명한 임금은 위급할 때를 헤아려서 변란을 제어하고, 충신은 어려울 때를 염려해서 권위를 세운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강한 진나라도 군주가 약해졌을 때, 조고(趙高)가 권력을 쥐고 조정 명령을 오로지하면서 위엄과 복락을 제 맘대로 하다가 망이궁의 화[望夷之禍]를 일으켰으므로 더러운 욕됨이 지금까지 이르렀다.(1)

(1) 진시황이 붕어하자, 호해(胡亥)를 황제로 세우고, 조고는 승상이 되었다. 호해는 흰 호랑이가 수레 왼쪽 곁말을 물어뜯자 그것을 죽이는 꿈을 꾼 후,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점몽(占夢, 왕의 꿈을 해몽하는 관리)에게 물으니, “경수(涇水)가 빌미가 되었다.”라고 점쳤다. 이에 호해가 망이궁(望夷宮)에서 재계하고 제사했다. 조고가 자신의 개 염락(閻樂)을 보내서 호해를 핍박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장화(張華)가 말했다. “망이궁은 장릉(長陵) 서북쪽 장평관(長平觀)에 있다. 동쪽으로 경수가 흐르고 북이(北夷)를 바라보므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 일은 『사기』에 나온다.

후에 여 태후에 이르렀을 때,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이 정치를 오로지하고, 임금의 정치[萬機]를 제멋대로 농단하면서 황실의 일을 결정하니, 아래는 능멸하고 위는 버려져서 온 세상이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강후(絳侯, 주발)와 주허후(朱虛侯, 유장)가 위엄을 일으키고 분노를 떨쳐서 역적을 주살하고 폭도를 멸한 후에 태종(문제)을 존립한 까닭에 도화(道化, 도로써 교화하는 것)가 흥하고 번성하며 광명이 [천하에] 녹아들어 드러날 수 있었다. 이는 곧 대신이 권위를 세운 밝은 표본이다.(2) 

(2) 여 태후가 [국정을] 오로지했을 때, 오빠의 아들 여록을 조왕(趙王) 겸 상장군(上將軍)으로, 여산을 양왕(梁王) 겸 상국(相國)으로 삼아서, 각각 남북군(南北軍, 한나라 금위(禁衛)의 군대. 황성 안에 있는 남군은 위위(衛尉)가, 황성 밖에 있는 북군을 중위(中尉)가 지휘했다.)을 거느리게 했다. 여 태후가 붕어했을 때, 난을 일으키고자 하므로 강후 주발과 주허후 유장(劉章) 등이 함께 그들을 주살하고 문제(文帝)를 옹립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칭했다. 『춘추좌씨전』에서 민자마(閔子馬)가 말했다. “아래는 능멸하고 위는 버려지니, 어찌 난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공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曹騰)은 옛날에 중상시(中常侍)였을 때 좌관(左悺), 서황(徐璜)과 함께 요얼(妖孽, 요악한 귀신이 불러오는 재앙)을 불러오고 재물과 음식을 탐하면서[饕餮] 방자하게 횡행함으로써(3) 교화를 손상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아버지 조숭(曹嵩)은 빌어먹던 것[]을 양자로 데려왔고,(4) 뇌물을 써서 자리를 샀으며, 황금을 수레에 싣고 보물을 가마에 얹어 권세 있는 집안에 재화를 실어 보내서 삼공의 벼슬[鼎司]을 몰래 훔쳐 나라의 중요한 자리[重器]를 기울이고 엎어뜨렸다. 조조는 환관의 추악한 자손으로 본래 빼어난 덕이 없었으며, 경박하고 교활하며 칼 쓰면서 협객질하며[僄狡鋒俠], 난리를 좋아하고 재앙을 즐겼다.(5) 

 

(3) 재물을 탐하는 것이 도(饕)이고 음식을 탐하는 것이 철(餮)이다. 관(悺)은 음이 오(烏)와 판(板)의 반절이다.
(4) 조숭에 관해서는 『속한지(續漢志)』에 나온다. “조숭은 자가 거고(巨高)이다. 영제(靈帝) 때 관직을 팔았는데, 조숭은 돈을 주고 대사농(大司農), 대홍려(大鴻臚)가 되었으며, 마침내 최열(崔烈)을 대신하여 태위(太尉)가 되었다.” 『삼국지』 「위지(魏志)」에 따르면, “조숭은 조등의 양자이다. 그 출생은 본말을 알 수 없다.” 『조만전(曹瞞傳)』 및 곽반(郭頒)의 『세어(世語)』에는 조숭이 하후씨(夏侯氏)의 자손으로, 하후돈(夏侯惇)의 작은아버지이며, 위 태조(魏太祖)는 하후돈과 사촌이라고 전한다. . 개(匄)는 걸(乞, 빌어먹다)과 같은 뜻이다.
(5) 『방언(方言)』에 따르면, “표(僄)는 경(輕), 즉 가볍다는 뜻이다.” 『삼국지』 「위지」에 관련한 일화가 있다. “조조는 어렸을 때 기민하고 재빠르며 권모와 술수가 있었고, 협객질을 뽐내고 방탕하게 놀아나면서 덕행과 학업을 닦지 않았다.” 봉협(鋒俠)은 칼끝의 예리함을 말한다. 표(僄)는 음이 방(方)과 묘(妙)의 반절이다. 어떤 책에는 ‘표(剽)라고 쓰였는데, 재물을 빼앗았다는 뜻이다. 음은 같다.

막부(幕府, 원소)는 매처럼 날랜 병사들을 거느리고, 흉적과 쓸어버리고 역적을 주살했다.(6) 이어서 동탁이 다른 관리의 직분을 침범하고[侵官], 나라를 해치는 일을 만났다. 이에 [막부는] 장검을 뽑아 들고 북채를 휘둘러서 동하(東夏, 동쪽 지방)에서 명을 일으켜 널리 영웅들을 망라하니 그 허물을 버리고 등용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조조를 불러서 더불어 책략을 묻기도 했다. 이는 그 사냥하는 매나 개 같은 재주[鷹犬之才]가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 즉 앞잡이라는 뜻)를 맡길 만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이 막상 닥치자 어리석고 경박함과 짧은 생각으로 가볍게 진군하고 쉽게 퇴각하니 다치고 죽고 꺾이고 움츠러들어 몇 차례나 장수와 군사를 잃었다.

(6) 원소(袁紹)가 환관[閹人]들을 주살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고 모조리 그 목을 벤 일을 가리킨다.
(7)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침관(侵官)은 모(冒), 즉 침범하는 것이다.”
(8) 자서(字書)에 따르면, “()는 경(), 즉 가볍다는 뜻이다.” 삼국지』 「위지에 관련 내용이 있다. “조조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성고현(成皋縣)을 점거하려고 형양군(滎陽郡) 변수(汴水)에 이르렀을 때,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과 만나 싸웠으나 불리해져서 사졸(士卒)들이 죽거나 다친 자가 많았다. 조조는 흐르는 화살에 맞았고, 타던 말도 상처를 입었다. 조홍(曹洪)이 조조에게 말을 주어 밤을 틈타 도망쳤다. 다시 여포(呂布)와 싸워 패배를 당했다.”

막부가 번번이 다시 병사를 나누어 주고 예봉이 될 것을 명하면서 [잃은 병력을] 고치고 채우고 보완하고 모아주었고, 표를 올려 동군태수(東郡太守)연주자사(兗州刺史)를 대행하게 하고, 호랑이 문양 옷을 입힌 후,(9)  한 무리 군사를 주어서 위엄과 권세를 이룰 것을 권했으니, 진나라 장수가 [여러 번 패배한 후] 한 번에 이겨서 보답한 일[秦師一克之報]을 기대한 것이다.(10) 그러나 [조조는] 끝내 지원받은 자원을 틈타서 멋대로 날뛰며, 방자하게 행동하고 모질고 심하게 굴면서 백성들[元元]의 뼈를 깎고 살갗을 벗기며, 현명한 이들을 죽이고 선량한 사람들을 해쳤다.(11) 

(9) 호문의(虎文衣)는 『속한지(續漢志)』에 나온다. “호분장(虎賁將)은 갈관(鶡冠, 잣새의 깃으로 꾸민 관)을 쓰고, 호문단의(虎文單衣, 호랑이 문양이 있는 홑옷)를 입는다. 양읍현(襄邑縣)에서 해마다 바치는 베로 호랑이 문양 옷을 짓는다.”
(10)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시(孟明視), 서걸술(西乞術), 백을병(白乙丙)을 시켜서 정나라를 주벌하게 했을 때,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효산(殽山)에서 패배를 입히고, 맹명시 등을 사로잡았다. 문영(文嬴)이 청하여 그들을 풀어주고 진(秦)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목공이 다시 맹명시를 등용하여 진(晉)나라를 정벌하게 하니, 진(晉)나라 사람들이 감히 출병하지 못하니, 효산에 시신을 묻고 돌아왔다. 이 일은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11) 원원(元元)은 『태공금궤(太公金匱)』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의 도는 [사람과] 친함이 없어서 항상 선한 이들과 함께한다. 지금 천하의 은나라에서는 현인이 숨어 사는 일[陸沈]이 오래되었으니, 이에 어찌 백성들[元元]에게 급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구강태수(九江太守) 변양(邊讓)은 재주가 빼어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곧은 말과 바른 낯빛으로 의론에 아첨함이 없었으나, 몸은 머리 잘려 매달리는 죽임을 당하고 처자식은 불타서 없어지는 듯한 재앙[灰滅之咎]을 입었다. 이때부터 선비들은 성내고 아파했고, 사람은 원망하고 하늘은 분노했다. 한 사내가 팔을 들어 올리자 주() 전체가 같은 소리를 냈으므로 조조 자신은 서주(徐州) 땅에서 깨지고, 땅은 여포(呂布)에게 빼앗기니,(12) 동쪽 끝자락 땅을 방황하며 발 딛고 근거할 땅이 없었다.

(12) 『삼국지』 「위지」는 말한다. “도겸(陶謙)이 서주목(徐州牧)이 되었다. 처음에 조조는 그를 정벌해 십여 성을 떨어뜨렸다. 후에 다시 도겸을 정벌해 다섯 성을 거두고 그 땅을 공략해 마침내 동해군(東海郡)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중에 담현(郯縣)을 지나는데, 때마침 장막(張邈)이 진궁(陳宮)과 더불어 모반해 여포(呂布)를 맞이하니, 군현(郡縣)이 모두 호응했다. 여포가 서쪽으로 가서 복양현(濮陽縣)에 주둔하니 조조가 그를 공격했다. 여포가 병사를 내어 싸우자 조조의 병사들은 달아나고 진이 어지러워졌다. 조조는 말을 몰아 불길을 뚫고 빠져나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이 불에 탔다. 사마(司馬) 누이(樓異)가 조조를 부축해 말에 올라서 드디어 물러나 달아날 수 있었다.

막부는 오직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한다[强幹弱枝]는 대의를 생각하고, 또한 모반한 무리가 잘되지 않게[不登畔人] 하려고 했으므로,(13) 다시 정기(旌旗)를 들고 갑옷을 입은 후 대자리 말듯 휩쓸면서 나아가 정벌하니, 쇠북이 우레처럼 울리자 여포의 무리가 깨어지고 꺾였다.(14) 막부가 조조를 죽음의 근심에서 건지고, 다시 그에게 방백(方伯)의 임무를 맡겼다. 이는 곧 막부가 연주(兗州) 땅에 덕을 베풀지 않고 조조를 크게 이루어 준 셈이 되었다.(15)

(13) 강간약지(强幹弱枝)는 「반고전(班固傳)」에 나오는 말이다. 부등반인(不登畔人)은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송나라 대부 어석(魚石) 등이 송나라 팽성(彭城)에서 모반해 초나라에 귀속해 있었다. 경서(經書)에 ‘송나라 팽성’이라고 쓰고, 그 「전(傳)」에 “송나라 땅이 아닌데, 옛날대로 쓴 것은 모반한 이들이 잘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두예(杜預)의 『춘추좌씨전주』에 따르면, “등(登)은 성(成), 즉 이룬다는 뜻이다.”
(14) 환갑(擐甲)은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이다. “갑옷을 입고 병사를 다스리게 한다.” 두예의 『춘추좌씨전주』에 따르면, “환(擐)은 관(貫), 즉 착용한다는 뜻이다.” 석권(席卷)은 『한서』에 나오는 양웅(楊雄)의 말이다. “구름을 거두고 자리를 말아 올리듯 하니[雲徹席卷], 나중에 남은 재앙이 없었다.” 『삼국지』 「위지」에 이 일화가 있다. “조조는 정도현(定陶縣)을 습격했으나 미처 떨어뜨리지 못했을 때, 때마침 여포가 도착하니 그들을 공격해 무찔렀다.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과 이봉(李封)이 거야현(鉅野縣)에 주둔했는데, 조조가 그곳을 공격했다. 여포가 설란을 구하러 왔다가 패하니 여포가 달아났다. 여포가 다시 진궁과 더불어 일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다. 이때 조조가 병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을 설치하고 기습 부대를 풀어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쉈다. 여포가 밤을 틈타 도망쳐서 동쪽으로 유비(劉備)에게 달아났다.”
(15) 『춘추좌씨전』에서 사신 여상(呂相)이 진(秦)나라와 절교하면서 한 표현이다. “진나라 군사들이 해를 입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으니, 이는 곧 우리가 서쪽에 큰일을 이루어 준 것[大造]입니다.” 두예의 『춘추좌씨전주』에 따르면, “조(造)는 성(成), 즉 이룬다는 뜻이다.”

얼마 후 어가가 동쪽(낙양)으로 돌아오려 할 때, 뭇 도적들 탓에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기주 땅에서는 북쪽 변방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 변두리 땅[離局]을 떠날 겨를이 없었으므로,(16) 종사중랑(從事中郞) 서훈(徐勳)을 사자로 보내서 조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교묘(郊廟)를 보수하고 어린 군주를 돕고 지키게 했다. 그러나 조조는 곧바로 뜻은 방자하고 행동은 오로지하면서, 위력으로 황실을 겁박하고 임금과 관료를 얕잡아 모욕하며 법을 해치고 기강을 어지럽혔다. 앉은 채로 삼대(三臺)(17)를 부르고, 조정의 정령을 멋대로 제정하며, 작위와 포상을 맘대로 하고, 형벌과 살육을 입맛대로 처결하니, 아끼는 이들은 오종(五宗)까지 빛을 내리고, 원한 있는 이들은 삼족(三族)을 주멸하면서,(18) 무리 지어 말하는 자는 드러내서 주살하고 속으로 비난하는 자들은 몰래 살육을 당하니,(19) 백성들은 길에서 눈짓만 하고 관리들은 입에 재갈을 무니,(20) 상서는 정기 모임을 기록할 뿐이고, 공경은 자리를 채우는 데 그칠 뿐이다.(21)

(16) 북쪽 변방에 일어난 위급한 일이란 공손찬(公孫瓚)이 원소를 공격한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국(局)은 부(部), 즉 부속된 것을 뜻한다.” 두예의 『춘추좌씨전주』에 따르면, “그 부곡(部曲)에서 멀어지면, 이국(離局)이라고 한다.”
(17) 『진서(晉書)』는 말한다. “한나라 관직에서 상서(尙書)는 중대(中臺)가 되고, 어사(御史)는 헌대(憲臺)가 되며, 알자(謁者)는 외대(外臺)가 되니, 이을 일컬어 삼대(三臺)라 한다.”
(18) 오종(五宗)은 위로 고조부에 이르고, 아래로 손자에까지 미치는 것을 말한다. 삼족(三族)은 아버지의 가족, 어머니의 가족, 아내의 가족을 말한다.
(19) 대사농(大司農) 안이(顔異)가 장탕(張湯)과 틈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안이를 고발하니 장탕이 추국을 맡았다. 빈객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 [빈객이] 조령(詔令)이 내려져 불편함이 있다고 말하자, 안이는 말하지 않고 입술을 살짝 안으로 말아 넣었다. 마침내 장탕이 상주하기를, 안이는 구경(九卿)인데, 조령이 불편하다는 말을 듣고도 들어와 말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 비난했으니[腹非], 사형을 의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은 『한서』에 나온다.
(20) 『국어(國語)』에 나오는 말이다. “주나라 여왕(厲王)이 잔학하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을 비방했다. 소공(邵公)이 왕에게 고하여 말했다.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왕이 화가 나서 위(衛)나라 무당을 기용해서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하고, 보고하면 곧 그들을 살해했다. 나라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눈짓만 했다.” 『주서(周書)』에 “어질고 총명한 이들은 입에 재갈을 물고 소인들은 혀에 북을 단다.”라는 말이 있다. 하휴(何休)의 『춘추공양전주(春秋公羊傳注)』에 따르면, “겸(柑)은 나무 재갈을 그 입에 물리는 것이다.” 겸(鉗)은 어떤 책에는 감(柑)이라고 쓰인 곳도 있다. 음은 거(渠)와 렴(廉)의 반절이다.

(21) 『한서』에 나오는 가의(賈誼)의 말이다. “대신들은 다만 장부와 문서가 조회 기간[期會]에 보고되지 않으면, 큰 변고라고 한다.”

옛날 태위(太尉) 양표(楊彪)는 이사(二司)를 두루 관장하는 [나라의] 으뜸 벼리로 지극한 자리에 있었다.(22) 그런데 조조는 자신을 흘겨보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죄 아닌 죄를 뒤집어씌워서 몽둥이질과 채찍질을 함께 가하고, 오독(五毒, 다섯 형벌)을 함께 베풀기에 이르렀으니,(23) 마음 내키는 대로 사특한 짓을 저지르고, 법률을 돌아보지 않았다

(22) 『속한서』에 이 일이 나온다. “양표는 동탁을 대신하여 사공이 되었고, 또 황완(黃琬)을 대신하여 사도가 되었다. 이때 원술(袁術)이 분수없이 난을 일으켰는데, 조조는 양표와 원술이 혼인을 맺을 것을 빌미로 [양표가 황제의] 폐위를 도모하려 한다고 무고하고, 상주를 올려 잡아들여 옥에 가둔 후, 대역죄로 탄핵했다.”
(23)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 일이 나온다. “양표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고 실정을 조사한 후, 끝내 책서를 내려 파직했다.” [오독에 대해서는 「외효전」을 참조할 것.]

또한 의랑(議郞) 조언(趙彦)이 충성으로 간하고 곧은 말을 올리니 의론해서 받아들일 만한 점이 있었으므로, 천자께서 귀 기울여 듣고 얼굴빛을 고치면서 녹봉[]을 더해 주었다. 조조는 때맞은 [임금의] 총명함을 어지럽혀 빼앗고 말의 길[言路]을 가로막고 끊기 위해 제 맘대로 조언을 잡아들여 선 채로 살해하면서 천자에게 보고한 후 처결 듣기[報聞]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또한 양효왕(梁孝王)은 돌아가신 황제[전한 경제]의 친동생으로, 그 왕릉의 존귀함이 널리 드러나 있어서 소나무, 잣나무, 뽕나무, 가래나무조차 공손하고 엄숙하게 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조는 관리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끈 후 몸소 무덤을 발굴하면서 관을 깨고 주검을 드러낸 후 황금과 보물을 약탈해서 취함으로써 천자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선비들이 아픔을 품게 하는 데 이르렀다.(24) 

(24) 『한서』에 따르면, [전한] 문제 두 황후는 경제와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를 낳았다.

또한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摸金校尉)를 설치하여, 지나는 곳마다 무덤을 헐고 구멍을 뚫으니, 주검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몸은 삼공(三公)의 관직에 있었으나 행실은 걸왕의 작태를 보여서 나라를 더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그 해독이 사람과 귀신에 모두 퍼졌다. 더하여 조조의 세세한 정령(政令)은 사납고 무참해 과방(科防, 금지와 형벌을 추가해 범죄를 막는 일)을 잇따라 설치하는 바람에 좁은 길에는 주살[矰繳]이 가득하고 큰길에는 함정 구렁이 막아서서 손을 들면 망과 그물에 걸리고 발을 움직이면 구덩이에 빠지니, 이로써 연주와 예주(豫州)에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백성이 없고, 도성에는 한숨 섞인 원망이 넘쳤다.(25)

(25) 요생(聊生)은 『관자』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에 도가 없으면, 사람이 관작과 위계가 있더라도, 모두 스스로 안심하고 살지[聊生] 못한다.” (그러나 현전하는 『관자』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 옮긴이)

고금의 전적에 실린 글을 두루 살펴볼 때,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포학하고 사나워서 무도한 신하들이 조조보다 심할까. 막부는 이때껏 바깥의 간악한 자들을 힐책하느라 지금까지 [조조의 무도함을] 미처 바로잡아 훈계하지 못한 채, 특별히 [그를] 감싸면서 미봉(彌縫)이나마 [조조가 스스로] 옳아지기를 바랐다.(26)  그러나 조조는 승냥이와 이리 같은 야심으로 몰래 화를 일으킬 음모를 품었다.(27) 이에 [나라의] 동량을 꺾고 부러뜨리고,(28) 한나라 황실을 외롭고 약하게 하고, 충신을 제거하고 선한 이를 해치니, 오로지 효웅이 되고자 했다.

(26) 미봉(彌縫)은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이다. “부서진 고을을 두루 꿰맸다[彌縫].” 두예의 『춘추좌씨전주』에 따르면, “미봉은 보합(補合), 즉 기워서 맞추는 일이다.”
(27) 시랑(豺狼)과 야심(野心)은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사마(司馬) 자량(子良)이 아들 월초(越椒)를 낳자, 영윤(令尹) 자문(子文)이 말했다. “반드시 그 아이를 죽이시오. 이 아이는 곰과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승냥이와 이리[豺狼]의 소리를 내니,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약오씨(若敖氏)를 멸망시킬 것이다. 속언에 ‘이리 새끼의 야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아이는 이리이니, 어찌 기를 수 있겠는가!”
(28) 동요(棟橈)는 『역경』에 나오는 말이다. “대들보를 휘게 하는 흉함[棟橈之凶]이여, [집을] 지탱할 수가 없구나.”

지난해, 정벌의 북을 치면서 북쪽으로 나아가서, 공손찬(公孫瓚)을 토벌했는데, 강하게 맞서고 사납게 거스르면서 한 해나 포위에 저항했다. 그가 아직 무찔러지지 않았으므로 조조는 몰래 [공손찬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돕는다는 핑계로 몰래 천자의 군대(원소군)를 습격할 뜻을 드러냈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와서 황하에 벌여둔 후 바야흐로 배를 타고 북쪽으로 건너려 했다. 때마침 지나던 사람이 이를 드러내서 폭로했고 공손찬도 목이 잘려 효수된 까닭에 그 날카로운 칼끝이 꺾여서 도모하는 바가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에 조조는] 오창(敖倉)을 점거해 주둔하면서 황하를 의지해 [진영을] 단단히 하니,(29) 이는 사마귀가 다리를 들어 웅대한 수레의 앞길을 막는 꼴이다.(30)

(29)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 일이 나온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황하에 벌여놓고, 말로는 원소를 돕는다는 핑계를 댔으나, 실제로는 업성(鄴城)을 습격할 것을 도모함으로써 공손찬을 도우려고 했다. 때마침 공손찬이 무찔러져 멸망했고, 원소 역시 이를 알아차리고 군대를 물려서 오창에 주둔했다.”
(30) 당랑지부(螳蜋之斧, 사마귀의 다리)와 관련한 일화는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온다. “제나라 장공(莊公)이 사냥할 때, 사마귀가 발을 들어서 그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자, 장공이 수레 모는 이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벌레인가.’ 수레 모는 이가 대답했다. ‘이는 사마귀입니다. 이 벌레는 나아감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모르니, 자기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가벼이 적에게 나아갑니다.’ 장공이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용사로구나.’ 수레를 돌려서 사마귀를 피하니 용사들이 모여들었다.” 『회남자』에도 이 일이 보인다. 또 『장자』에도 이 말이 나온다. “사마귀가 성내면서 팔을 들어서 수레바퀴를 막은 것은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수(隧)는 도(道), 즉 길이라는 뜻이다.

막부는 한나라의 신령한 위엄을 받들어 천하를 절충(折衝, 적을 제압해 승리를 취함)하고자 하니, 장극(長戟)을 든 병사 일백만에, 호기(胡騎)가 일천 무리로, 중황(中黃)하육(夏育)오획(烏獲) 같은 용사가 일어서고,(31) 좋은 활과 굳센 쇠뇌를 갖춘 군세를 풀어놓으니,(32) 병주(幷州)에서는 태행산(太行山)을 넘고,(33) 청주(靑州)에서는 제수(濟水)와 탑수(漯水)를 건너고,(34) 대군(大軍, 원소)은 황하(黃河)에 배를 띄워 조조의 앞을 잡아채고, 형주(荊州)에서는 완현(宛縣)과 섭현(葉縣)을 떨어뜨려 그 뒤를 끌어당길 것[]이다.(35) 우레가 울리는 듯 호랑이가 걷는 듯, 다 같이 도적(조조)의 뜰에 모여드니, 횃불을 들어 마른 쑥을 불사르는 것 같고,(36) 차가운 바닷물을 퍼부어 타는 숯을 끄는 것 같으니,(37) 어찌 조조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겠는가.

(31) 『시자(尸子)』에 중황(中黃)의 일화가 나온다. “중황백(中黃伯)이 말했다. ‘나는 왼손으로 태행산의 원숭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무늬 호랑이를 잡았으나, 코끼리만은 아직 시험하지 못했다.’” 범휴(范睢)가 진(秦)나라 소왕(昭王)에게 “오획(烏獲)과 임비(任鄙)의 힘, 경기(慶忌)와 하육(夏育)의 용맹”이라고 유세한 일화가 『사기』에 있다.
(32) 양궁(良弓)은 『문자(文子)』에 나오는 말이다.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良弓]을 창고에 감춘다.” 『사기』에서 소진(蘇秦)이 한(韓)나라 왕에게 유세했다. “천하의 강한 활[强弓]과 굳센 쇠뇌[勁弩]는 모두 한나라에서 나옵니다.”
(33) 원소가 생질 고간(高幹)을 병주자사(幷州刺史)로 삼았으므로, 태행산을 넘어 도우러 온다고 한 것이다.
(34) 원소의 큰아들 원담(袁譚)이 청주자사(靑州刺史)였다. 제(濟)와 탑(漯)은 둘 다 물 이름이다. 지금 제주(齊州)의 경계에 있다. 탑(漯)은 음이 타(他)와 합(合)의 반절이다.
(35) 가규(賈逵)의 『국어주(國語注)』에 따르면,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을 기(掎)라고 한다.” 음은 거(居)의 의(蟻)의 반절이다. 『춘추좌씨전』에 “[사슴을 잡을 때] 진(晉)나라 사람이 그 뿔을 잡고[角], 우리 융족이 그 다리를 끄는[掎]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형주는 유표(劉表)를 말한다. 원소와 더불어 교통하였으므로 완현과 섭현을 떨어뜨린다고 한 것이다.
(36) 『초사』에 관련한 말이 있다. “근심과 걱정을 만나면 곧 깨달을지니, 가을 쑥에 불을 놓는 것 같네.”
(37) 황석공(黃石公)의 『삼략(三略)』에 관련한 말이 있다. “모름지기 의로움으로 불의함을 치는 것은 황하를 터서 등불을 가라앉히는 것 같아서 반드시 이기는 법이다.”

지금에 이르러 한나라의 도가 구릉과 같다가 밋밋해지고[陵遲], 그 벼리(기강)가 늦춰져 그물(법도)이 끊어졌다. 조조가 정예 병사 700명으로 궁궐을 둘러싸 지키면서 바깥으로는 [천자를] 모시고 지킨다면서 안으로는 붙잡아 잡고 있으니, 찬탈과 반역의 재앙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날까 두렵다. 바야흐로 충신들이 간과 뇌를 땅에 쏟을[肝腦塗地, 몸을 던져 애쓸] 시절이고, 열사들이 공을 세울 기회이다. 어찌 힘을 쏟지 않을 수 있겠는가!(38)

(38) 『진림집(陳琳集)』에 의거하면, 이 격문은 진림(陳琳)이 쓴 것이다. 『삼국지』 「위지」에 따르면, “진림은 자가
공장(孔璋)으로 광릉군(廣陵郡) 사람이다. 난을 피해 기주에 오니, 원소가 전적과 문장을 맡겼다. 원소가 패하자,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가 말했다. “경은 지난날 본초(本初, 원소)를 위해 글을 옮긴 바 있다. 다만, 죄상은 나뿐이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악행을 이 몸에서 그치지 않았으며, 어찌하여 위로 조부에까지 이른 것인가?” 이에 진림이 사죄했다. 조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허물을 삼지 않았다.” 떠도는 판본에는 이 아래에 “진림의 글이다.”라고 적혀 있는데, 그릇된 것이다.

진림의 「원소를 위해 예주에 부친 격문(爲袁紹檄豫州)」. 일명 「조조를 토벌하는 글(討曹操文)」. 중국 역사상 가장 잘 쓴 격문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