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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말년의 헤밍웨이가 남긴 글쓰기의 비결

《문화일보》에 실린 서평입니다. 『헤밍웨이의 말』(권진아 옮김, 마음산책, 2017)을 다루었습니다. 말년의 헤밍웨이가 남긴 네 편의 인터뷰를 엮은 가볍고 따스한 책입니다. 누구나 하룻밤 만에 읽을 수 있습니다.




말년의 헤밍웨이가 남긴 글쓰기의 비결


“우리 세대에 작가 헤밍웨이에게 감동받지 않은, 자기 전설의 창조자 헤밍웨이에게 매혹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이 말이 입술을 탄 지 무려 60년을 훌쩍 넘겼지만, 이 ‘우리’가 전혀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열일곱 살에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읽고, 스무 살에 『무기여, 잘 있어라』를 읽고, 서른 살에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면, 아니 인생 어느 시기에 그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읽었다면, 이 말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항상 ‘지금 여기’에, 시간을 잊은 존재로 곁에 있다.

헤밍웨이의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링에 올라 권투를 하는 것 같다. 한마디 속삭임 없는 격렬한 전투가 읽는 내내 지속된다. “길고 지루하고 가차 없고 무자비한 싸움”이라고 명명했던 그의 글쓰기가 만들어 낸, 군더더기 표현이 하나도 없는 단어의 무수한 잽들을 맞아가면서 단숨에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잠시라도 멈칫 하는 순간, 핵 펀치를 얻어맞고 영문 모르는 패배자가 된 채 바닥까지 널브러지기 일쑤다. 

실제, 그의 작품을 읽는 법은 작가 자신이 우리에게 슬며시 가르쳐주었다. “생각나요. 호텔 방에서 한 번도 나가지 않고 90시간 동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교정쇄를 읽었어요.”

문장의 속도를 좇다 보면 일체의 중간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읽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밀실 같은 곳에 자신을 단단히 가두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읽기를 그의 작품은 강요한다. 

헤밍웨이는 ‘빙산 원칙’에 따라 글을 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마다 물밑에는 8분의 7이 있”기에, “[독자가 이미] 아는 건 뭐든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재빠르게 덧붙인다. “작가가 모르기 때문에 뭔가를 생략한다면, 그때는 이야기에 구멍이 생겨요.”

하드보일드라는 독특한 문체를 낳은 이 창작 원리는 작가가 글을 쓸 때와 비슷한 높이의 긴장을 독자의 읽기에서도 만들어 낸다. 정제된 문장으로부터 빙산 아래쪽에 잠겨 있던 세계를 투사해서 작가와 퍼즐을 맞추어야 하는 전투 말이다.

1954년은 헤밍웨이에게 영광과 악몽이 동시에 찾아온 해다. 두 해 전인 1952년에 발표한 걸작 『노인과 바다』 덕분에,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다 간신히 살아났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1961년 자살할 때까지 심각한 병고에 시달렸다. 

『헤밍웨이의 말』에는 이 무렵부터 말년에 이르는 동안, 그가 극도로 피하고자 했던 네 차례 인터뷰가 실렸다. 쿠바까지 찾아가 인터뷰를 성사시킨 매체들은 《파리 리뷰》, 《애틀랜틱 먼슬리》, 《토론토 스타》, 《에스콰이어》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 유명세가 싫어요. 인생에서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글을 쓰고 사냥하고 낚시하고 알려지지 않고 사는 것뿐입니다. 명성은 괴로워요. 질문들은 고통스럽습니다.”

이 당시, 헤밍웨이는 쿠바에 살면서 파리처럼 달라붙는 사람들을 피해 은둔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오직 작품을 창조하고 인생을 즐기는 데에만 쏟으려 했다. 말이 아니라 글에 전념하려 했다. 그 덕분이리라. 이 책에서 사냥총 들고 큰소리로 떠벌리는 알코올 의존자 헤밍웨이가 아니라 우리는 상상 밖의 헤밍웨이, 즉 따스하고 친절하며 속삭이는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의 낯선 헤밍웨이 말이다.

“허락 없이 내 집에 왔군요. 그건 옳지 않아요. 나는 책을 쓰는 중이고 인터뷰는 하지 않습니다.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요. 그래도 들어와요.”

물론, 이 책의 순금 부분은 헤밍웨이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해 준 데 있다. 글쓰기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한테 그는 끝없이 투덜거린다.

“난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매우 좋지 않다고 믿습니다. 작가는 눈으로 읽으라고 쓰는 거고, 설명이나 논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하지만 기자들은 끈질기게 파고들고, 그는 가끔씩 비밀의 창고를 열어 준다.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헤밍웨이 말대로 그 문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추어들이 문체라고 부르는 건 보통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뭔가를 처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다 불가피하게 나타난 어색함에 불과”하다고 그는 툭 내뱉는다. 그러므로 헤밍웨이로부터 글쓰기에 영감을 얻으려는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도 다른 부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지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찾고 있었다는 겁니다. 글러브가 어디에 떨어질지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휙 내던지는 외야수의 동작이나 권투선수의 운동화 고무밑창 아래에서 송진이 내는 찍찍거리는 소리, (중략) 이런 것들이 이야기를 알기도 전에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들이죠.”

이런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사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출발지점이 생긴 후의 글쓰기란 육체노동에 가깝다. 작가는 추적자로서 그 움직임의 이후를 끈질기게 좇을 뿐이다. 

“아직도 신명이 남아 있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지점까지 쓴 다음, 거기서 멈추고 다음 날까지 꾹 참고 살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창조의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는 육체가 쇠약해지면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필멸의 시간 속에서, 지난번보다 더 나은 작품을 써서 불멸하기를 바랐던 거장의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깝게 기록되어 있다. 기자 중 한 사람이 말한다. “헤밍웨이는 사소하고 날카로운 기억이 끈질기게 잔상을 남기는 경험이었다.” 이 말은 정말 옳다.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 지금껏 나는 그의 그림자를 마음에서 벗겨낼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