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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논어 공부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4] 교언영색주공(巧言令色足恭) _훌륭한 말솜씨와 잘 꾸민 얼굴빛과 지나친 공손함을 부끄럽게 여기다

5-25 공자가 말했다. “말솜씨가 좋고, 얼굴빛을 잘 꾸미며, 공손함이 지나친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운 일로 여겼는데, 나 역시 부끄럽게 생각한다.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벗하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운 일로 여겼는데, 나 역시 부끄럽게 여긴다.”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배병삼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새긴다. 말솜씨가 좋고 얼굴빛을 잘 꾸미며 지나치게 공손한 자세를 수치로 여긴 것은 “자신의 이중성을 부끄러워함이니 겉과 속이 다름을 뉘우침”이요, 마음에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하는 처세를 수치로 여긴 것은 “남을 대하는 태도의 이중성을 부끄러워함”이다. 전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성찰, 곧 충(忠)이고, 후자는 타자에 대한 자기 성실성의 성찰, 즉 신(信)이라는 것이다. 

옛 잘못을 마음에 품지 않은 백이와 숙제, 세간의 평과 달리 곧다고 할 수 없는 미생고 다음에 이 장이 나온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세 장은 모두 직(直)을 다룬다.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마음에서 움트는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인(仁)할 수 없다. 백이와 숙제는 불온한 자들과 단 한 순간도 머무르려 하지 않았지만, 그 허물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지 않았기에 인자라고 불릴 수 있었다. 미생고는 항상 자신이 말한 바를 굳게 지키려 했으나, 타자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인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좌구명의 입을 빌려서 공자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살지 말 것을, 그로써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부끄러움이라고 부를 것인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면 부끄러운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짓을 안 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사량좌는 이 구절을 “배우는 이들이 심각하게 경계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를 살펴서 곧음[直]으로 마음을 세우게 하려 한 일”이라고 풀이했다. 공자 스스로는 부끄러울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으나, 천하에 이와 같은 짓이 횡행함을 부끄러이 여겼다는 뜻이다. 부끄러움은 단지 자신이 죄악 또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생기는 마음의 움직임이 아니다. 

자기가 스스로 잘못을 행하고, 그 잘못이 타자(신, 양심을 포함한)의 시선에 노출되었을 때(스스로 의식했을 때), 이를 부끄러워하는 일은 사람의 본성이다. 맹자는 이를 수오지심(羞惡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마사 누스봄은 우리가 수치를 느끼는 것은 “소중한 가치를 지닌 목적이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가치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있음”(『혐오와 수치심』, 민음사)을 보여 준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며, 그 불완전성을 승인함으로써 올바른 삶으로 나아가려는 실마리[端]를 이룬다.

그러나 공자는 단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타자의 행위로부터도, 집단의 불의로부터도 온다. 완전히 불의한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은 아마도 의로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함이란, 한 방향으로 고정된 채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는 상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 주듯, 세계의 관절은 늘 어긋날 수밖에 없다. 유전체는 항상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사소한 변동만으로도 반드시 돌연변이를 낳는 법이다. 타자에게 가하는 무서운 폭력을 통해 인간은 저절로 비인간으로 변태한다. 그 차이, 이질성이 내면에 잠재해 있던 씨앗을 발아시킨다. ‘입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칼을 품은’ 인간의 존재를 아는 것은 현재 인간의 영속성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현존하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을 떠올리도록 강제한다. 지금-인간이 아니라는 것, 겉과 속이 하나로 이어진 새로운 인간이 있어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다짐을 공자는 ‘부끄러움[恥]’라는 말로 간결하게 집약한다.

부끄러움의 반대쪽에 뻔뻔함이 있다. 이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무감함도 있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규칙에 함몰하는 것을 말한다. 에릭 호퍼에 따르면, “집단 속에서 자기 가치를 찾는 패배자”, 즉 광신자들의 마음 상태이다. 들뢰즈는 이 상태를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우리 시대와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유를 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시대에 결박된 채 머물러 살아가려는 게으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공자는 당대 지식인의 행동 방식, 말솜씨를 뽐내고 얼굴빛을 잘 꾸미며 공손히 구는 것, 속으로는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친구처럼 구는 처세술을 부끄러워했다. 마음이 붙지 않고 가식으로 이루어진 행동양식을 공자는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임방(林放)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는 답했다. “크구나, 질문이여! 예란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며, 장사란 술술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 당대의 귀족들은 자신의 마음을 담지 않고도 예를 훌륭하고 능숙하게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 생각에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일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부끄러움을 느낌으로써 그런 삶과 단절을 단호히 하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君子]을 이루고자 했다. 오늘날 부끄러움을 알고 군자가 되려는 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 장을 읽으면서 깊게 묻고 또 묻는다.



자왈(子曰), 교언영색족공(巧言令色足恭), 좌구명치지(左丘明恥之), 구역치지(丘亦恥之). 

여기에서 말하는 좌구명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주희는 옛날 노나라의 이름난 현인으로 보았다. 공자의 제자이면서 『춘추좌전』을 쓴 좌구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터무니없다. 『춘추좌전』은 전국시대 중엽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기』에 좌구(左丘)가 눈이 먼 다음에 비로소 『국어(國語)』를 지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가 좌구명인지도 불확실하다. 다산 정약용은 공안국의 해석을 좇아서 이 사람을 노나라의 태사로 본다.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 역시 같은 입장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은 「학이」 편에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언(言)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말에는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란 말과 함이 일치하는 것으로, 신중히 말하고 말한 바는 반드시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는 믿음이 없는 말, 즉 신뢰 없이 솜씨로만 꾸며진 말(巧言)과 속마음과 다른 겉모습(令色)을 아주 싫어했다. 足은 여기에서는 ‘주’로 읽어야 한다. 지나치다는 뜻이다. 주공(足恭)은 공손함을 과장되게 꾸미는 일로 아첨과 같다. 본래 공(恭)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그 마음이 말투와 표정에 드러나는 일이고, 경(敬)은 정성을 다하여 사람(특히 윗사람)이나 사물, 또는 자신에게 당면한 일(사태)을 대하는 것인데, 공손함을 꾸민다면 마음이 몸가짐에 저절로 드러나는 곧음은 있을 수 없다. 부남철은 교언영색(巧言令色)과 주공(足恭)을 셋으로 나란히 보지 않고 “교묘한 말과 낯간지러운 표정으로 지나치게 공손하게 하는 것”이라고 옮겼다. 다산이 足을 ‘이루다’(成)라는 뜻으로 보았는데, 아마도 이를 참조한 것이리라. 


익원이우기인(匿怨而友其人), 좌구명치지(左丘明恥之), 구역치지(丘亦恥之).

리링은 이 구절을 마음속에 한이 맺혀 이를 악물면서도 표정은 오히려 그 사람과 대단히 친숙한 것처럼 꾸미는 행위라고 했다. 이는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행위다. 리쩌허우는 윤리와 정치의 이율배반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자기 원한을 숨기고 다른 사람과 겉으로만 사귀는 일은 정치가에게는 일상적인 일이고, 그러지 않고는 정치를 행할 수 없는데, 공자는 이러한 삶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라고 했으니 이는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