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職)/책 만드는 일

콘텐츠 기획자가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


지난 수요일 순천향대학교에서 두 번째 강의를 했다. 그날 이후 이런저런 일로 너무 바빠서 강의록을 정리하지 못했다. 내용을 요약하고 표현을 조금 손보아서 여기에 올려 둔다. 



콘텐츠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학과에도 마침 콘텐츠라는 말이 들어가 ‘미디어콘텐츠 학과’입니다. 이 명칭은 시대의 첨단을 따르고 있지만, 국문과나 경제학과와는 달리 신생인 만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하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제가 하는 이 강의의 이름도 ‘콘텐츠와 창조성’입니다. 이쯤 되면 ‘콘텐츠’의 마법을 아시겠죠. 민들레의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이 말은 지금 곳곳으로 퍼지면서 영토를 넓혀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콘텐츠란 무엇일까요? 흔히 어떤 문화 상품의 내용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책, 연극, 오페라, 음악, 영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문화 상품 전체를 정의할 때에도 가끔씩 쓰입니다. 아직 안정된 개념이 아니어서 쓰는 사람마다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지만, 어느 경우든 문화 상품의 ‘내용’에 방점을 찍고 주목하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요즈음 콘텐츠가 중요해졌다면, 문화 상품의 물질적 가치(외형)보다는 거기에 담길 내용적 가치가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있더라고 이를 물질적으로 구현하려면 적절한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가령,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분들이 각각 도제를 받아서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비법을 전수하는 것은 어떤 내용이 문화[상품]로 성립하려면 그 내용에 걸맞은 물질적 형식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갖추는 데 기나긴 고투의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출판 편집 분야만 하더라도, 짧게는 이삼 년에서 길게는 십여 년 동안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통해서 ‘책 만들기’의 기본을 배우고 익히는 수련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편집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력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콘텐츠의 시대란, 문화의 물질 가치를 담보하는 데 쓰이는 기술(비법)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내용 가치를 이룩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의 중요성이 커져 버린 시대를 말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변화의 근저에는 디지털 혁명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모바일 혁명이 이 변화를 가속화했습니다. 휴대 전화 버튼만 누르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화면이라는 단일 평면 위에서 모든 문화[상품]을 즐기고 싶다는 소비자들의 욕망은 문화[상품]의 물질적 측면을 소거하거나 단순화하고, 오로지 문화[상품]의 내용적 측면에만 주목하는 거대한 문화적 편향을 낳았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장인적 손작업으로 만드는 문화[상품]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놀이 공원 같은 체험을 제공하는 문화[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디지털 세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거꾸로 상승할 가망성이 높겠죠.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화[상품]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마 화면이라는 디지털 평면을 통해서일 겁니다. 이미 어떠한 문화[상품]도 이 디지털 평면을 통과하지 않고는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페이퍼 미디어들이 급속히 몰락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결국 손작업으로 하든, 체험 문화 상품이든 간에 디지털 평면에 통합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현상을 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해 보자면, 콘텐츠 시대는 문화[상품]의 물질적 가치를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제로(0)에 가깝게 떨어지므로 내용적 가치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문화[상품]의 유통 비용 역시 제로에 가깝게 떨어지고 있습니다.(네이버웹툰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문화[상품]의 창조자로서 일하려 한다면, 앞으로 제작이나 유통 쪽에서는 가치를 더할 수 없으므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려면 내용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문화[상품]의 물질적 측면을 구축하는 첨단 기술을 익히는 길도 있습니다. 다빈치나 백남준이나, 제가 얼마 전에 전시회에 다녀왔던 카푸어 같은 사람들은 콘텐츠에 맞추어 그것을 물질적 실체로 만들어 주는 매체 자체를 창조하는 기술도 있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프로그래밍도 공부하고 손 기술도 익혀서 이들처럼 진정한 창조자로 거듭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제가 이번 학기에 진행하는 ‘진(Zine) 만들기’는 이를 위한 작은 연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모두가 함께 쓰기 편리하도록 문화의 물질적 측면을 구현해 주는 기술은 소수의 천재들만이 보유해서 그 일을 수행할 것이고, 사람들 대부분은 내용에 집중함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시대, 이런 시대를 콘텐츠 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구글이나 애플 같은 디지털 기업들이 수행하는, 이른바 플랫폼 비즈니스의 윤곽선은 콘텐츠 시대라는 시대적 기반 위에 서 있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 시대를 더욱더 확산하는 쪽으로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용이란 또 무엇일까요? 내용에서 창조성을 보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문화[상품]를 창조하려는 이들을 한없이 괴롭힙니다. 제 답은 간단합니다. 소설가 김영하의 말처럼, 여러분은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예술가가 되지 않아도, 주어진 일만 잘해 내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정보를 축적하고 지식을 구축하는 일조차도 전문 영역에 속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운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각 분야의 일급 전문가 수천 명이 모여서 서로 협력해서 만들었던 이 사전은 한때 전 세계 교양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모두가 한 질씩 빚을 내서라도 집에 들여놓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라인 사이트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책을 집에서 보기란 힘들어졌습니다. 모두 위키디피아와 구글을 이용하지요. 

세상은 이제 사물인터넷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사물들끼리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정보를 송수신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서울의 버스정류장에 가면, 버스와 정류장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도착시간 등을 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차장에 가면 번호판을 자동으로 인식해서 주차장 프로그램에 등록시키는 장치도 흔해졌습니다. 자동차와 신용카드가 연동되면 이제 더 이상 주차장에 드나드는 데 사람이 일일이 주차비를 계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죠.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단순 노동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가령,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인 의사의 경우 역시 사물인터넷 시대에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혈압이나 체온과 같은 간단한 생체 정보와 몇 마디 문진만을 이용해서 3분 만에 처방전을 발행하는 것이 의사의 작업 표준 중 하나라고 해 보죠.(물론 저는 이 3분에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단은 인정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는 이 작업 표준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는 데 어마어마한 투자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물인터넷을 이용한 ‘원격 진료’라는 것입니다. 의료 민영화의 도구로 쓰이고 있어서 예로 들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렇게 가정해 보죠. 가령, 사용자 동의를 얻은 후, 애플워치나 구글글래스 같은 ‘착용 컴퓨터(wearable computer)’에서 사용자의 기초 생체 정보(체온, 혈압, 맥박 수 같은)를 인식한 후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갖춘 의료보험공단 따위의 컴퓨터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사용자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생기면 자동으로 사용자에게 처방전을 발행하거나 국립의료원 등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는 것도 분명히 가능할 것입니다.

‘로봇과의 경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이 경쟁에서 이길 확률은 아주 희박합니다. 앞으로 30년 안에 여러분이 창조적이고 전문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직업들이 점차 사라져 기계 노동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자동차나 선박이나 비행기 등 교통수단을 운항하는 데에 인간이 필요 없는 시대가 곧 올 것입니다.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는 무인 비행기 드론을 택배 배달에 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즉 전적으로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깔고 다시 ‘내용’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학자들은 콘텐츠가 실어 나르는 ‘내용’을 네 가지 차원으로 분류합니다. 흔히 F-I-K-W 사다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여러분 중에서도 이미 들어본 사람이 있겠지만,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F는 Fact(사실)입니다. 어쩌면 세계 그 자체를 이루는 부분들, 가령, “1115번” “마을버스” “시속 35킬로미터” “거리 300미터” 같은 조각들입니다. 

I는 Information(정보)입니다. 정보는 사실 조각들을 간단히 재구성해서 “1115번 마을버스가 3분 후에 도착합니다.” 등과 같은 세계에 대한 기초적 인식을 제공합니다. 

K는 Knowledge(지식)입니다. 지식은 “마을버스가 오늘도 연착인 것을 보니 도시 행정 서비스가 엉망인걸.”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정보와 정보를 이어 붙여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W는 Wisdom(지혜)입니다. 지혜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즉 어떤 정보는 보존되어야 하고 어떤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가령,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차 없는 도시를 만들자. 이를 위해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모으자.”와 같은 제안은 지혜 없이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가치를 창조합니다. 고갱의 그림 제목처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지혜는 우리 존재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문화를 창조하려 할 때, 흔히 콘셉트(Concept)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원에 따르면, 콘셉트란 본래 임신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임신해야 합니다. 무한한 여성성으로 무엇인가를 배태해야 비로소 출산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임신해야 할까요? 세계에 대해서 왜(Why)라고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사회나 국가가 생긴 이유,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를 물음으로써 우리는 인간을, 세계를 혁신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파고들어 점유해 가고 있는 영토는 무엇(What)이지 왜(Why)가 아닙니다. 기계가 스스로 생성해 주고받는 것은 정보이고 지식이지 왜라고 묻고 그에 대해 답하는 지혜가 아닙니다.

개강 때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지금 무엇(What, 정보)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은 우리에게 기계가 생산한 정보들(사물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점점 그 양이 폭발하는)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손에 쥐어 든, 더 나아가서 마침내 안경이나 시계와 같이 신체의 일부가 되어 가는 이 기기들은 우리에게서 생각을 빼앗아 갑니다. 생각의 근육을 훈련해서 튼튼하게 만들 시간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최지향 옮김, 청림출판, 2011)에서 말한 것처럼, 스물네 시간 내내 쏟아지는 대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속해서 사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즉 노예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콘텐츠 기획자 또는 생산자가 되려면 전적으로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계에 대해 ‘왜’라고 물어보기, 즉 정보의 일단 정지, 지식의 순간 멈춤이 필요합니다. 직진하는 정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식의 흐름에 보를 세워서, 정보와 지식이 내 안에 머물면서 자라나 새롭게 태어나는 열 달을 확보해야 합니다. 정보와 지식을 생각의 지층 아래로 복류시켜서 시간을 보낸 후에 용출하게 해야 합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텍스트가 놓인 콘텍스트를 옮겨서 낯설게 한다고 말합니다. 세계를 이제까지와 다르게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세계를 낯설게 하는 것은 세계를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것, 세계의 가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저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에서 세계를 다시 쓰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읽고, 읽고 다시 쓰는 이 혁명이 좌절했을 때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피로 얼룩진 혁명이 도래한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니 지금,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을 합시다. 예술가가 됩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대학에 들어와 있습니다. 대학이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시시하게 취업이나 시켜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 관계자 중에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백이면 백, 자기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대학이란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 내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나 정보는 기껏해야 유효 기간이 10년도 안 됩니다. 물리 법칙처럼 영구불변해 보이는 것조차도 길어야 30년입니다. 아까 직업을 이야기할 때 이미 말한 바 있지만, 30년 후에는 여러분이 배운 지식이란 전부 휴지통에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여러분에게 쑤셔 넣으려 하는 직업 정보나 관련 지식은 여러분을 혹하려 하는 것일 뿐, 여러분이 이곳에서 꼭 챙겨야 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보다는 ‘학습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고독 속에서, 남이 알아주든 말든 혼자 공부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공부 그 자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에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이 수업에서 공유 경제라는 말을 듣고 그 내용을 요약해 두는 것은 여러분 인생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챙겨야 하는 것은 ‘사람들은 왜 공유하는가?’와 같은 질문 자체입니다. 

이 수업을 통해 여러분이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질문들을 모으는 사람, 그러니까 예술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