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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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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산속에서 갑자기 감회가 일어(日夕山中忽然有懷) 저물녘 산속에서 갑자기 감회가 일어(日夕山中忽然有懷) 이백 달은 누각 사이 봉우리를 머금고(月銜樓間峰), 샘물은 섬돌 아래 돌을 씻어 내리네(泉潄階下石). 깨끗한 마음 이로부터 얻으니(素心自此得), 참된 즐거움은 바깥에서 얻는 게 아니라네(眞趣非外借). ==== 산속 개울에서 달 보면서 발 담그고 싶은 밤이네요.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박행산전지댁유제(朴杏山全之宅有題, 행산 박전지의 집에서)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 집에서 홍규(洪奎, 1242~1316) 술잔은 항상 채워야 하지만,찻잔은 깊은 것을 쓰지 않는다.행산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자분자분 다시금 마음을 털어놓으세. 朴杏山全之宅有題 酒盞常須滿,茶甌不用深.杏山終日雨,細細更論心. 이 시를 지은 홍규(1242~1316)는 고려 말의 문인으로, 자신의 매부이자 무신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행서와 초서에 뛰어나 글씨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박행산전지(朴杏山全之)는 벗인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의 호와 이름을 같이 적은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호를 지을 때 거주하는 곳의 지명이나 특징을 살려서 짓곤 했는데, 행산(杏山)은 아마도 박전지의 집 근처에 살구나무 숲이..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오형(吳詗)의 추일범주(秋日泛舟, 가을날 배를 띄우다) 가을날 배를 띄우다 오형(吳詗, 1242∼1314) 물새는 떴다가 가라앉고,모래톱은 곧았다 구부러지네.배 옆으로 산이 그림을 펼치고,노를 맞아 물결이 꽃을 피우네. 秋日泛舟 水鳥浮還沒,沙洲直復斜.傍舟山展畵,迎棹浪生花. 이 시는 고려 후기의 문신 오형의 작품입니다. 오형은 어릴 때 이름인 오한경(吳漢卿)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으며 마음이 너그럽고 꾸밈이 없어 대인의 풍모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가을날 배를 띄우다(秋日泛舟)」는 오형의 문재를 알 수 있는 수려한 작품으로 공민왕 때 최해(崔瀣, 1288∼1340)가 편집한 『동인지문(東人之文)』(1355)에 실려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시는 두 수 연작으로 된 작품 중 뒤의 것입니다.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요즈음 같은 만추..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홍빈(崔鴻賓)의 서황룡사우화문(書黃龍寺雨花門,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최홍빈(崔鴻賓, ?~?) 늙은 나무는 겨울바람에 울고, 잔물결은 저녁 빛에 출렁이네.오락가락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노라니어느새 눈물이 옷깃을 적셨구나. 書黃龍寺雨花門古樹鳴朔吹,微波漾殘暉.徘徊想前事,不覺淚霑衣. 황룡사(黃龍寺)는 신라 경주에 있었던 절입니다. 고려 중기 몽골의 침입 때 불타 버렸는데, 남은 절터만 보아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화문(雨花門)은 황룡사에 있던 문 이름입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따르면, 이 문은 신라 화랑들이 건립했다는데, 주변 풍광이 황량해서 지나는 이마다 감상에 젖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화(雨花)란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첫 번째로 설법할 때 하늘이 열리면서 꽃이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떨..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임규(任奎)의 강촌야흥(江村夜興, 강마을 밤에 흥이 일어서) 강마을 밤에 흥이 일어서 임규(任奎, 1119~1187) 달빛은 어스름한데 새는 물가로 날고,안개 앉은 강물은 저절로 물결치네.고깃배는 어느 곳에서 잠들려 하는가,아득한 곳에서 한 줄기 뱃노래 소리 들리네. 江村夜興月黑鳥飛渚,煙沈江自波.漁舟何處宿,漠漠一聲歌. 좋은 시는 한 폭 그림과 같은데, 그 안에서 소리조차 들려줍니다.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임규가 지은 이 작품은 좋은 시의 조건에 온전히 부합합니다. 시인은 저녁 어스름에 강가로 나와 있습니다. 해는 저물어 천지가 완연히 어둑해질 무렵입니다. 그믐달인지, 아니면 구름에 가렸는지 달빛조차 오늘따라 흐릿합니다. 새들은 하나둘씩 둥지를 찾아서 강가 모래톱으로 날아갑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물안개가 일어 강 위로 내려앉습니다. 그 사이로 물결이 일렁입니다. ..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당(崔讜)의 마상기인(馬上寄人, 말 위에서 사람에게 주다) 말 위에서 사람에게 주다 최당(崔讜, 1135~1211) 한 번 이별하고 한 번 만남이 있다면,잠시 헤어지는 것이 또 어찌 상처가 되랴.마음으로 다시 못 볼 걸 알기에,애가 끊어지고 또 끊어지네. 馬上寄人 一別有一見,暫別又何傷.情知不再見,斷腸仍斷腸. 최당은 고려 중기 문인입니다. 관직에 나아갔다 은퇴한 후 친구들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해서 시와 술을 즐겼기에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렸다는 말이 전합니다. 이 시는 이별의 정을 노래한 별시(別詩)입니다. 임을 두고 떠나가는 말 위에서 헤어지는 마음을 담아 남긴 시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을 담은 시의 정조가 솔직하면서도 애절해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돌아옴을 아는 이별은 슬퍼도 슬프지 않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별은 상처가 아니라 추억을 남길 뿐..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고조기(高兆基, ?~1157)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렸는지시냇물소리 한 자락 베갯머리 서쪽으로 흘렀네.새벽에 뜰 앞의 나무를 쳐다보니잠든 새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았구나. 山莊雨夜 昨夜松堂雨,溪聲一枕西.平明看庭樹,宿鳥未離棲. 맑고 깨끗한 시입니다.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글자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눈으로는 새벽 풍경이 선연히 보이고 귀로는 물소리도 들려오니 저절로 감탄이 돋습니다. 시골의 새벽은 새소리로 가득합니다. 소쩍새, 부엉이 같은 밤새들 울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닭이 울어 젖히고 낮새들이 서둘러 일어나 벌레 잡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려시대 시인 고조기가 맞은 이 새벽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풀벌레조차 울음을 잊은 듯 적막합니다. 그때, 시인은..
지하철 시에 대하여(기독교방송 인터뷰) 열흘 전에 기독교방송 박재홍의 뉴스쇼에서 지하철 시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새벽에 한 인터뷰여서 힘들었습니다만, 아래 기사로 정리되어 나왔기에 블로그에 일단 옮겨둡니다. 아무래도 입말을 옮긴 것이라서 거칠기에, 본래 제가 예비 질문지에 써 두었던 글로 대체해서 게시합니다. “수준 미달 지하철 詩, 알고 보니 문단 장삿속?” ■ 방송 : CBS 라디오 FM 98.1 (07:30~09:00) ■ 진행 : 박재홍 앵커 ■ 대담 : 장은수 (문학평론가) 출근길 만원 지하철을 기다리시면서 지금 이 시간에 라디오 들으시는 분들 많으시죠?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주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지하철 내의 스크린도어에 실린 시 한 편인데요. 대부분 읽기도, 이해하기도 쉬운 시들이죠. 보시면서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