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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박행산전지댁유제(朴杏山全之宅有題, 행산 박전지의 집에서)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 집에서


홍규(洪奎, 1242~1316)


술잔은 항상 채워야 하지만,

찻잔은 깊은 것을 쓰지 않는다.

행산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

자분자분 다시금 마음을 털어놓으세.


朴杏山全之宅有題


酒盞常須滿,

茶甌不用深.

杏山終日雨,

細細更論心.



이 시를 지은 홍규(1242~1316)는 고려 말의 문인으로, 자신의 매부이자 무신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행서와 초서에 뛰어나 글씨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박행산전지(朴杏山全之)는 벗인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의 호와 이름을 같이 적은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호를 지을 때 거주하는 곳의 지명이나 특징을 살려서 짓곤 했는데, 행산(杏山)은 아마도 박전지의 집 근처에 살구나무 숲이 있었거나 은행나무가 있어서 붙은 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전지는 지난주 읽은 오형(吾詗)과도 친분이 있었던 당대의 명사였습니다. 시는 홍규가 벗인 박전지의 집을 찾았을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지은 작품입니다. 친구 사이의 교분이 정감 있게 잘 표현된 좋은 작품입니다.

첫 구절의 주잔(酒盞)은 ‘술잔’을 말합니다. 수(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박전지와 홍규 두 사람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습니다. 술잔은 채워야 맛이거니, 그득그득 채워서 호방하게 마십니다.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웃음소리와 함께 천하만사가 하나씩 입에 붙었다 떨어졌다 합니다. 흥에 겨워 노래도 한 자락씩 나누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구절의 다구(茶甌)는 ‘차 사발’입니다. 술과 달리 차는 조금씩 따라서 향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십니다. 불용심(不用深)은 ‘깊은 것을 쓰지 않는다’로 새길 수도 있고, ‘깊을 때까지 따르지 않는다’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술상을 물리고 다탁을 놓고 마주 앉아 차를 달입니다. 향이 서서히 오르고 첫맛은 쌉싸래하고 뒷맛은 달짝지근한 찻물이 혀를 적시면서 말소리가 서서히 잦아듭니다. 

저는 이 시에서 셋째 구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마법의 변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까부터 비는 내렸을 겁니다. 술을 마시면서 세사를 희롱할 때에는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홀연히 가슴을 파고듭니다. 물방울이 공중을 떠다니는 것만 같은 가랑비였을 겁니다. 줄기가 굵거나 세찼다면 벌써 알아챘을 테니까요. 차분히 바라보노라니 마음에서 세속의 먼지가 씻기는 것 같습니다.

세세(細細)는 ‘세세히’ ‘하나하나씩’ ‘자분자분’ 등으로 읽습니다. 술을 마실 때에는 누구나 영웅이 되어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는 목소리를 느슨히 하면서 조용히, 차분히 이야기합니다. 更은 ‘고치다’라는 뜻일 적에는 ‘경’으로, ‘다시’라는 뜻일 때에는 ‘갱’으로 읽습니다. 여기에서는 ‘갱’입니다. 론심(論心)은 ‘마음을 나누다’로 새기면 어울릴 듯합니다. 중년의 사내가 친구 집을 찾아서 그윽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운치가 있어 부럽기만 합니다. 가까운 시일에 벗들과 어울려 추억을 만들고 싶어집니다. 꼭 그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