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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최홍빈(崔鴻賓)의 서황룡사우화문(書黃龍寺雨花門,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최홍빈(崔鴻賓, ?~?)


늙은 나무는 겨울바람에 울고, 

잔물결은 저녁 빛에 출렁이네.

오락가락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노라니

어느새 눈물이 옷깃을 적셨구나.


書黃龍寺雨花門

古樹鳴朔吹,

微波漾殘暉.

徘徊想前事,

不覺淚霑衣.



황룡사(黃龍寺)는 신라 경주에 있었던 절입니다. 고려 중기 몽골의 침입 때 불타 버렸는데, 남은 절터만 보아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화문(雨花門)은 황룡사에 있던 문 이름입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따르면, 이 문은 신라 화랑들이 건립했다는데, 주변 풍광이 황량해서 지나는 이마다 감상에 젖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화(雨花)란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첫 번째로 설법할 때 하늘이 열리면서 꽃이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입니다. 진리가 현현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최홍빈은 생몰과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시도 겨우 이 한 편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황룡사 우화문에 붙어 있던 이 시는 주변의 황량한 풍광과 어울리는 비분한 감정을 잘 그려내었기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송나라 학사 호종단(胡宗旦)이 고려에 귀화한 후 경주를 둘러보다가 황룡사 우화문에 붙이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참으로 뛰어난 재주로다.”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호종단이 개경으로 돌아가 왕(예종)에게 경주 다녀온 일을 고하면서 이 시를 읊으니, 이때부터 널리 알려졌습니다. 

삭풍(朔風)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이로 보아 계절은 겨울입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늙은 고목이 스스스 소리를 냅니다. 바람이 나무를 건너 연못의 물결을 일으킵니다. 잔물결이 연못 가득 일어나고, 짧은 겨울 해가 지면서 남은 빛이 물결에 놀라 반짝입니다. 겨울바람에 황혼이라, 하늘과 땅이 어둠에 젖어가는 것을 보니 마음에 황량함이 더해 갑니다. 구멍이 뚫린 듯 텅 비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어 마음을 달래려고 황룡사 앞마당을 이리저리 거닙니다. 한때는 천년왕국 신라를 지키는 수호사찰이었건만, 지금 사람들 발길이 잦아들고 나니 그 거대함은 도리어 쓸쓸함만을 부추길 뿐입니다. 시인 본인의 화려하지 못했던 생애도 같이 머릿속을 가득 메웁니다. 진사라고는 하나 역사에 행적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 뜻을 크게 펴지는 못한 듯합니다. 화자 자신의 개인적 불우와 기나긴 역사의 덧없는 변전이 서로를 끌어올리면서 비감이 가슴을 온통 헤집습니다. 이럴 때에도 울 수 없다면, 도대체 눈물이란 왜 존재하겠습니까?


첫 구절에서 삭(朔)은 삭풍, 즉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말합니다. 

둘째 구절에서 미파(微波)는 바람에 보이지 않게 일렁이는 잔물결을 뜻합니다. 양(漾)은 물결이 일렁이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잔휘(殘暉)는 석양빛을 말합니다. 해가 지고 나서 남은 검붉은 빛을 말합니다.

셋째 구절에서 전사(前事)는 지나간 일을 뜻합니다. 화자 자신의 젊은 날일 수도 있고, 황룡사의 화려했던 시절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중층적으로 둘 모두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넷째 구절에서 불각(不覺)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점의(霑衣)은 ‘옷깃을 적시다’는 말입니다. 감개와 비감에 어느새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저물어 가는 황혼 무렵, 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내가 비분에 젖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선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