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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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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학생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고등교육은 기존의 사유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을 증명해 내는 일인데,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대학들은 필연적으로 과학이든 예술이든, 또는 정치든 문화든, 또는 영향력 있는 사회의 집단이든 하나의 신념 체계이든, 대상을 불문하고 현재의 기득권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수전 세일) _리처드 도킨스 외, 『옥스퍼드 튜토리얼』, 노윤기 옮김(바다출판사, 2019)에서 ===== 옥스퍼드 튜토리얼은 교수나 강사 같은 전문가(튜터)와 학생이 일주일에 한두 번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학습하는 일종의 개인지도 과정입니다. 옥스퍼드 대학 수립되기 이전인 11세기부터 실시되었다고 전하며, 옥스퍼드대학 학생들은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니다. 학생이 자기가 정한 주제를 에세이로 써..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역사를 생각하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기억할 만한 함축적 문장이 있다. “역사 연구는 원인에 대한 연구다.” (중략) 인과관계의 분석은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쓰던 시기에 실제로 역사 연구의 중추였다. 그 이후 수십 년간 강조점을 다른 곳에 두는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즉, 위대한 사건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줄고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어떻게 믿고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중략) [역사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역사가의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조직하는 나르시시즘과 다름없다. _ 사라 마자 ========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지, 벌써 50년에 가깝다.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오래된 책에 기반을 두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이제는 넘어설 필요가 있다..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와서,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지상의책, 2019)를 읽었다. SF 작가 김보영과 SF 평론가 박상준이 함께 쓴 이 책은 ‘질문의 책’이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로봇이 인격을 가질 수 있을까, 로봇에 사람 인격을 넣으면 그 로봇은 그 사람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흉내 내는 로봇일까, 클론에게 내 기억을 이식하면 이 클론은 같은 ‘나’일까, 만약 로봇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을 살아 있는 것일까, 꿈을 조작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꿈속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같은 흥미로운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에 대한 실감을 전 인류가 느끼게 된 오늘날, 이 질문들은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하게 떠올리게 된 것이요, 일찍부터 영민한..
출판과 종교(필사에서 종교로, 금속활자에 대하여)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낼 만큼 오랜 출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수도사의 일과가 성경을 베껴 쓰는 일과 기도로 이루어졌듯이, 고려의 승려도 경전을 직접 베껴 쓰며 사경을 제작했다.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 성경과 경전이라는 신앙 공간, 종교의 성전(聖典)을 매개로 꽃피었다. 대장경에는 불교의 성전이라는 신앙적 의미로서뿐 아니라 지식을 체계화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대장경판이 봉안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 당대의 노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중략)필사의 방식에서 목판 인쇄로의 발전은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장면 중 하나이다. 나..
자유의 근대를 넘어서 윤리의 근대로 냉전이 끝나고 근대가 전면적으로 개화하며 전 세계가 미국과 프랑스를 본받아 자유를 원리로 하는 국가, 사회, 제도를 만들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역설적으로 근대가 힘을 잃고 소모되어 스스로를 감히 ‘보편적’이라고 내세울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1970년대 말에 일어난 이란혁명은 이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징후였습니다. 중동 지역에 자유를 기본 원리로 삼은 국가가 아니라 ‘이슬람 부흥주의’의 기치를 내건 국가가 등장하면서 중동은 격동의 시대로 빠져들었습니다. (강상중) ======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내세우고 정치-경제-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경제(돈)가 모든 사회 조직을 지배하는 근대라는 게 마르크스의 뛰어난 통찰이다.레닌이 발명한 소비에트는 국가와 사회를 하나로 묶는 총력..
땡스북스의 지속 가능성 최근에 생겨난 대부분의 작은 독립서점들은 사장이 직접 일을 해서 인건비를 줄이지 않고는 운영할 수 없는 구조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아실현과 사회적 봉사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적자가 계속되면 버틸 수 없다. (중략)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이 덩치 큰 기업형 가게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작고 독특한 형태가 되지 않으면 어렵다. 이미 책을 살 수 있는 서점들로 넘쳐나는 홍대 앞에서 땡스북스가 지금의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경쟁력 없는 서비스들을 줄이며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카페 기능을 없애고 더욱더 특별한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것을 고민 중이다. 이제는 오히려 서점의 본질인 책에 깊숙이 집중하는 것이 그 어떤 특색보다 더 개성 있다고 생각한다. =====..
미국의 독립서점이 부활한 이유는 미국 독립서점의 부활은 중앙과 온라인에 집중된 소비문화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만든 ‘바이 로컬(Buy Local)’ 운동을 시작점으로 촉진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전국의 많은 도시에서 독립서점 대표들은 그들의 경제적 이익에 사회적 가치를 결합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미국 독립서점 부활의 비결은 세 가지다. (1) 서점을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Convening) 오프라인 단골고객 리스트를 활용하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큰 비용 없이 저자와 출판사, 독자 간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독립서점들은 이제 얼마나 책을 많이 팔았느냐가 아니라, 독자들이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2) 서점을 사람이 책을 직접 추천하는 공간으로(Curation) 독립서점들은 ..
‘동네서점×쏜살문고 프로젝트’ 이후, 민음사는 동네서점에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있나 작년 여름에 진행했던 ‘동네서점×쏜살문고 프로젝트’ 이후, 민음사는 동네서점에서 어떤 일을 기획하고 하려고 할까? 첫째,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신구간 이벤트, 저자와의 만남, 에디션 제작 등과 같은 마케팅 활동들을 작은 서점에서도 꾸준하게 해나가면서 일종의 마케팅 루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중략) [독립서점만의] ‘히트상품’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잡을 수 있었다. 이는 동네서점에서 마케팅을 기획하려는 마케터에게나 동네서점 운영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서점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둘째, 독자들이 동네서점을 찾는 이유인 ‘취향의 발견’과 ‘책을 활용한 다양한 경험’을 충족시킬 수 있는 콘텐츠들을 서점들과 함께 고민하는 일이다. 더불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