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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일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아마도 이상적인 출판사의 미래 모습은 저자가 제공하는 원자재인 원고를 다듬는 1차 산업, 책에 담긴 콘텐츠를 온라인 제품으로 재가공하는 2차 산업, 이를 다시 파생상품(만화, 게임, 영상자료)으로 연출하는 3차 산업이 한 지붕 아래 종합상사처럼 집합한 형태일 수도 있다. 출판사 편집자는 더 이상 잘 팔리는 필자 섭외와 오탈자 교정으로 전문성을 낭비하는 대신에, ‘열린 책’인 하이퍼텍스트의 건축가 또는 디자이너로 자신의 직업의 본질을 바꾸어야 한다. 마셜 맥루한이 창안한 고전적인 개념을 빌리자면, 책(문자)이 대변하는 ‘차가운 매체’와 영화(영상)가 상징하는 ‘뜨거운 매체’의 경계는 사라지고 ‘보이는 라디오’와 ‘읽어주는 오디오북’처럼 하이브리드 뉴 미디어가 지배하는 신세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
독서의 가치 _블로그, 잡지, 책 중 어떤 걸 읽는 게 더 좋을까? 평균적인 성인의 독서 속도는 1분에 약 250단어다. 평균적인 블로그 게시글은 약 800단어이므로 게시글을 읽는데 3분 30초가 걸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들여서 독자는 무엇을 얻을까? 내 경우로 보자면 독자는 저자의 약 사흘치 노력을 얻는다. 일반적인 블로그 게시글 하나를 쓸 때 나는 1.5일을 들여서 해당 주제와 관련된 조사 작업을 하고 다시 1.5일을 들여서 원고를 쓴다. 조사 작업은 주로 책과 기사를 읽는 것으로 채워진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나누는 대화도 포함된다. (중략) 이것이 바로 가치의 교환이다. 독자는 3분 30초를 들여서 저자의 노력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 (중략) 잡지의 기사를 살펴보자. 나
약자의 호소와 권력의 몰락 살려고 일하러 간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광주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외벽 붕괴, 양주 삼표산업 골재 채취장 토사 붕괴, 여수 여천NCC 폭발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안전의식 타령은 그만하자. 위험 감수를 압박하는 현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말단 노동자의 작업 거부는 어렵다. 아무도 직접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 파견된 노동자라면 하소연 자체가 사치다. 그 처지를 모른 체하면 위선자, 못 느끼면 사이코패스다. 그런데도 법은 현장 앞에서 자꾸 멈추고, 정의는 법정에서 자주 반려된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 관련 며칠 전 판결도 역시나였다. 원청 대표는 위험을 몰랐다면서 무죄였고, 관련 임직원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억울한 죽음에 유가족 한은 쌓여간다. 하소연..
상처의 독서(황정은) 책 중에 특히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책은 읽는 사람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쳐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예컨대 르포 기록 노동자들의 책을 읽는 경험은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를 생각하게 하고 타인을 대하는 마음과 타인의 사정을 생각할 여지를 주기도 해요. 저는 그런 책들의 도움으로 너무 무감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고통을 담은 책을 읽을 때 내가 상처받는 이유는 상처 입은 누군가가 이미 있기 때문이니까, 저는 그런 독서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감당하고 싶어요. _ 황정은(채널 예스 인터뷰 중에서) ===== 요즘 황정은이 깊게 탐구하고 있던 것은 '상처'의 문제다. 타자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을 때, 자기 안에서 변화하는 것을 성실히 좇고 기록해서 이야기로 만들기. 이는 지극히 염결한 ..
연마와 공부 저는 곡에 대한 공부를 좋아합니다. 모던타임스 레퍼토리를 짤 때는 독일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탐독했어요. 덕분에 연주 작품의 배경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죠. 곡을 공부한다, 피아노를 공부한다는 말이 어색한가요? 피아노는 기술 연마와는 또 다른, 공부라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칭을 하는 건 연마죠. 저는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두들겨 가며 리듬감을, 화장품을 바르고 두드릴 때도 리듬감을 생각해요. 이것도 연마에요. 곡을 연습할 때 작곡가의 생애를 찾아보는 건 공부죠. 그 곡을 지금까지 연주한 사람들의 디스코그라피(discography·레코드목록)를 조사하는 것도요. 평소 헤겔, 릴케의 저서와 시를 읽어요. 역사책도 탐독하고요. 클래식 연주란 죽어 있는 텍스트를 되살리는 작..
입소문 효과 사람들은 흔히 묻는다. 소셜미디어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알리고, 주변 사람이 다 좋아라 하는데, 왜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고 책은 팔리지 않을까?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매일 1만 6000단어 분량의 정보를 공유하며, 시간당 1억 건 이상 브랜드 관련 대화를 나눈다. (옛날 숫자임) 모든 구매 결정의 20~50퍼센트는 입소문이 주요 원인이다. 아마존닷컴에 별 다섯 개짜리 서평은 별 하나짜리 서평보다 20권 더 책을 팔리게 한다. 매일 주고받는 대화는 광고보다 10배 이상 효과가 크다. 누구나 입소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업이든, 가게든, 단체든, 정당이든, 개인이든. 게다가 입소문은 무엇이라도 인기를 끌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 입을 어떻게 여느냐다..
미래에 걸어 맹세하지 마라 네가 내 과거를 망쳐 버려서 미래에 씻어낼 눈물이 한없이 많아. 네가 죽인 부모의 자식들은 살아남아서 마구 보낸 청춘처럼 늙어 가며 탄식하고 네가 죽인 자식들의 부모는 살아서 메마른 고목처럼 늙어 가며 탄식해. 미래에 걸어서 맹세하지 마라. 과거를 망쳤으니 쓰기 전에 망쳤어. _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이상섭 옮김(문학과지성사, 2016)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상섭 선생님 번역으로 오랜만에 「리처드 3세」를 읽었다. 권력 중독의 상징인 리처드 3세는 척추 측만증의 장애를 안고 태어나 두꺼비, 거미 등의 모멸적 별명으로 불리고 더러운, 추악한, 불쾌한 등의 형용사를 평가어로 달고 살아간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채, 피 비린내 나는 장미 전쟁의 와중..
소수 의견 [다수와 소수] 두 의견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관용되고 나아가 더 격려되고 더 지지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소수의 자리에 있게 된 의견이다. 그것이, 무시된 이익을 당분간 대변할 의견이며, 인간 복리 중에서 그 정당한 몫을 다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 측면을 당분간 대변할 의견이다. 인간 지성의 현 상태에서는 오직 의견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제각각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측면을 공정하게 다룰 기회가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세상의 명백한 만장일치에 대해 예외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뭔가에 대해 그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들을 가치는 항상 존재한다. 그들의 침묵에 의해 진리가 뭔가를 잃게 될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설령 세상이 올바르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