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813)
근대 과학 - 틀리는 게 정상 우리는 지식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포퍼에 따르면, 근대 과학의 혁명은 증명이 아니라 반증을 핵심 무기로 삼은 데에서 왔다. 개별자들은 자기 가설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과학 자체는 잠정적으로 입증된 모든 가설의 비판을 기초로 작동한다. 실험, 논리, 시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과학자들은 선배들의 언어를 시체로 만들어 무덤 속으로 보낸 후 기념비를 세운다. 그러나 근대 과학의 진짜 위대한 점은 반증 자체가 아니다. 틀려도 살해당하거나 매장당하지 않는 지적 경쟁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포퍼는 말한다. "우리의 가설을 우리 대신 죽게 한다."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가설의 패배는 실각, 유배, 사약이었다. 틀림은 곧 죽음이었다. 아직도 우리 ..
좋은 정부 정치적 회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이 보호되고 번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이 보호되고 번영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가장 확실한 증후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의 수와 인구다. 그러므로 그토록 논란거리인 좋은 정부의 증후를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외국에서 들어오는 부, 귀중한 재화, 식민지 없이 시민들이 더 붐비고 증가하는 정부가 틀림없이 더 좋은 정부이며, 인민이 감소하고 쇠약해지는 정부가 더 나쁜 정부다. 계산하는 자들이여, 나머지는 당신의 일이다. 세고, 재고, 비교하라. _ 장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김영욱 옮김(후마니타스, 2018) 중에서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예전에 밑줄 쳐 둔 부분만 잠깐 훑어 읽었다. 일반..
완성작이 없으면 작가가 아니다(박찬욱) 박찬욱은 우선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의 의미를 일깨운다. 그는 “초보자의 문제는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조차 못 한다는 것”이라며 “끝까지 써본 경험이 없다면 작가가 아니다. 나쁜 작가조차 못 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정 좋은 생각이 안 나면 ‘싸구려 클리셰’를 동원해서라도 신(scene)을 메워라. 끝까지만 갈 수 있다면 문제의 그 아쉬운 장면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충고한다. 박찬욱은 스토리텔러의 기본 자질과 관련해 “쉽게 만족하지 말고 기준을 높게 가져라”고 말한다.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라며 대충 타협하면 안 된다. 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들과 비교하며 작업을 하는데도 이 정도밖에 못 만들고 있다. 기준조차 낮다면 아무것도 안 된다.” ==== 이렇답니다. ..
도스토옙스키와 민중의 발견 우리 민족의 가장 숭고하고 단호한 성격의 특징은 정의감과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건 없건 수탉처럼 달려드는 습성, 이런 결점은 그들에게 없다. 표면에 뒤집어쓰고 있는 껍질을 벗겨 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신중하게 그 알맹이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민중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자도 민중에게는 가르칠 것이 많지 않다. 단언하건대, 오히려 반대로 현자들 자신이 민중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 죽을 위기를 넘어서서, 또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베리아 감옥 생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민중의 진실이다. 고통 어린 ..
인간이란 웅성거리는 소리, 시끄러운 소리, 웃음, 욕설, 쇠사슬 소리, 악취,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 낙인 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열린책들, 2010) 중에서 ===== 이렇답니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 - 취소 :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의 SNS 팔로를 취소하는 데서 연유한 용어.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이나 불매 운동 등을 통해 상대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행위. - 트롤링 : 관심 끌기, 관심 유발, 화나게 하기 등을 일부러 저지르면서 이를 오히려 즐기는 행위. 누군가를 사회적 제물로 삼아서 남의 감정을 일부러 훼손하고 그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것. ----- 발언을 감시하고 공개 모욕을 무기로 삼는 문화 권력을 쥔 쪽은 대개 좌파였다. 2017년 캣 로젠필드는 에 "청소년용 서적이 강력한 소셜미디어 철회, 트롤링 및 연쇄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생애 첫 소설을 발표한 한 작가는 실제로 자신의 책을 읽은 적도 없는 온라인 패거리에 스..
북풍행(北風行) 차가운 북쪽에는 촉룡(燭龍)이 살아 떠오르는 아침해처럼 빛난다는데, 어찌하여 이 땅에는 해도 달도 비추지 않고 북풍만 하늘에서 세차고 매섭게 불어오는 걸까. 방석처럼 커다란 연산(燕山)의 눈꽃만 송이송이 흩어져 헌원대(軒轅臺)에 쌓이네. 임 그리운 유주(幽州)의 아낙은 12월이 되면 노래 그치고 웃음 거둔 채 미간을 찌푸리고는 문에 기대 행인들을 바라보며 남편을 떠올리네, 장성에서 매운 추위에 떨 그대여, 슬프구나. 이별할 때 칼을 차고 변방을 구하리 하고 가면서 호피에 금박 입힌 이 화살통을 남겨두었지. 속에 든 흰 깃 화살 한 쌍에는 거미가 줄을 치고 먼지가 덧쌓였구나. 화살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사람은 싸우다 죽어 돌아오지 못하나니 이 물건 차마 더는 볼 수 없어서 불살라 이미 재로 변했다네. 황하..
비트겐슈타인의 오두막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19세기에 양모 교역과 철강 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쌓음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 성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등이 드나들면서 연주하고, 구스타프 클림트가 누나 마르가레테의 결혼 기념 초상화를 그릴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른바 ‘엄친아’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버트런드 러셀에게 철학을 배웠다. 머리가 좋았다. 스승조차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스물아홉 살에 철학사상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썼다. 이 책은 철학 탐구의 대상을 인간과 세계의 문제에서 언어의 문제로 바꾸어 놓았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올바로 보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