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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 -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


일반적으로 책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책을 이루는 문장이 만드는 호흡은 읽기의 속도나 밑줄이나 메모의 유무 등을, 심지어 장소까지도 결정한다. 주말에 시골마을에서 읽으려고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을 챙겨 갔다. 올해 여섯 번째 책으로, 청탁과 관계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앞머리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넘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공포와 굴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위험에 도전한 기록이다. 특히 호기심에 이끌려 저항한 기록이다. 호기심은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온갖 종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길이고, 문제를 미세한 분자로 분해해서 경이로운 대상으로 만들어 준다.”

책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삶의 심오함을 드러내는 신선하고 풍부한 일화들, 한 사람의 경험을 모두의 문제로 만드는 적절한 질문들, 기지와 통찰이 적절히 어우러진 문장들, 무엇보다도 평이함 속에 지혜를 감추어 둘 줄 아는 저자의 재능이 빛나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읽기’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훌륭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주말 이틀 동안 읽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책이었다. 이 책은 모두 스물여덟 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졌는데, 읽다 보면 각각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에 일어서 버린다. 하루에 잘해야 한두 가지 질문 정도를 깊게 생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의 물결이 끊이지 않은 탓에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저자의 예언이 실현된 느낌이다. “이 책은 읽다가 도중에 덮지 못할 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잠시 사색하면서 책의 내용에 관해 자기만의 대화를 시작하게 해 준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 책을 야금야금 읽으면서 함께할 것 같다.  (2017. 01. 15)


6장은 앤드류 카네기의 이야기다. 이 장의 중심 질문은 "돈이 많다는 것만으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앤드류 카네기는 돈을 많이 번 후에 끊임없는 공허에 시달렸다. 그는 온갖 곳에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헛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가혹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했고, 그들과 같이 사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그들을 내쫓고 불리한 노동조건을 강요했다.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카네기는 우정을 갈구했으며, 유명인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그가 '친애하는 친구들' 중 하나로 생각했던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빈정댔다. "그는 왕과 황제와 군주를 우습게 생각한다고 떠들지만 이들 중 누구 하나가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을 보내 주면 일주일 내내 도취되고 7년 내내 신나게 혀를 놀릴 사람이다." 결국 그는 우정을 얻지 못했고 환대를 받지도 못했으며, 아마 더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리므로, 그는 틀림없이 불행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시어도어 젤딘은 말한다. "돈을 버는 것이 여전히 매력적인 신기루로 남아 있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의 쾌락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의 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만 번영에 몰두하는 경제의 장점에 관해, 부의 축적과 지출에 관해 좀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만으로는 계산되지 않는다. 부와 함께 얻어야 하는 다른 가치가 부족하다면, 인생에서 참된 안락함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카네기의 삶이 우리에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수치로는 측정하지 못하는 것들을 간과한다면 꽃다발 줄기를 세면서도 꽃송이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놓치게 된다." (2016. 01. 16)

7장은 영국의 화가 벤저민 헤이든의 자살을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을 통해 영원하고 위대한 교훈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그의 그림은 부르주아 대중한테 전혀 이해받지 못했고, 그는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 단호한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그를 자살로 몰아간 것은 돈 그 자체는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그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절망이었다. “친구라고 믿었던 한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는 그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우정에 기댈 수 없다면 다른 무엇인 남았겠는가?”

헤이든이 살던 시대는 “이웃의 정이 살아 있는 문명”으로부터 “돈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실에 만족하는 문명”으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베니스의 샤일록처럼, 회계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냉혈한들이 도덕적 단죄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상호 부조를 불러오는 이웃과의 정서적 유대가 밑바닥부터 파괴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 사이의 계약을 디딤돌 삼는 돈의 가혹한 평등성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결과는 대출자의 삶에 전혀 관심을 품지 않는 익명의 회사로 이루어진 새로운 금융제국, ‘조세피난처의 탄생’이다. 이는 “돈이 사회를 결속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대출과 상환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약자들의 형편을 봐주는 자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인류와의 정서적 유대를 끊어버리고 스스로 혈관을 끊고 서서히 자살을 감행했다.” 시어도어 젤딘에 따르면, “가장 우울한 자살”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의 자살이다. “고마워하는 마음의 자살”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을 자존의 파괴이고 자유의 훼손이자 견딜 수 없는 수치로 여긴다. 

아아, 고마움을 주고받는 것이 “독립에 대한 모독이자 자존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2016. 01. 17)

8장은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 압두라만 와힛과 이슬람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반나의 이야기다. 이 장의 중심 질문은 "종교가 다른 사람들, 또는 무신론자와 신자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다. 와힛과 알반나는 같은 이슬람 교도이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조직을 이끌었던 와힛은 "이슬람은 포섭과 관용과 공동체의 종교"이며, "민주주의는 이슬람에서 필수요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슬람은 차이를 존중하고 인간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성향에 따라 신을 이해한다고 인정"했다. 중세 이슬람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와힛은 "인문주의와 세계보편주의를 융합하여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에 비해 알반나는 "주의를 분산시키는 모든 자잘한 방해 요소를 거부하고 오직 코란에서만 마음의 양식을 얻었다." 그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이슬람을 위해 살고 죽겠다"고 맹세하기를 바랐으며, 그의 종교적 형제들이 "혼란스럽고 이교도 개념이 잡다하게 뒤섞인 생각"을 거부하기를 바랐으며, 이집트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애국주의에 불을 지폈다.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했다.

두 사람은 분명히 다른 길을 걸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해서 두 종교가 화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젤딘은 말한다.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남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보고 그들의 생각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하는 것은 "불일치를 풍부한 경험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017. 01. 19) 

제9장은 마니(213~276)의 이야기다. 300년 넘게 세계 최대의 종교였으며, 중국에서 도교와 결합해서 1000년 넘게 흥망성쇠를 반복한 마니교의 창시자다. 마니의 일생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거의 처음으로 접했다. 이 책은 이 부분만으로도 사실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장의 중심 질문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통합하는 단일 종교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마니가 바로 그런 종교를 꿈꾸었다. 마니교에는 독자적 교리가 있었지만, 어떠한 종교와도 융합할 수 있었다. 마니의 주장은 정말 매력적이다. 스터디 주제로 삼아, 중요한 책들을 모두 뽑아 읽고 싶을 정도다. 

“마니는 신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서 천사들이 아무리 애써도 선과 악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악은 탐욕에서 나온다. 악과 싸워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전쟁과 갈등과 빈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는 도피처를 제공했다. 아름다움과 관대함, 비폭력, 채식주의, 소박한 삶이 그것이었다.” 악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고매한 것으로 끌어올리고, 이웃들과 관대하고 평화롭게 어울리면서, 욕망을 억제해서 일상의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얻는 법을 설파한 것이다. “마니는 어떤 종교와도 느슨하게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보복은 철저했고, 마니교는 세상 모든 곳에서 탄압을 받고 사라졌다. 

오늘날 종교적 분쟁이 심화하는 현실에서 마니의 존재를 되비추는 것은 중요하다. 저자는 종교의 역사를 훑어 내리면서 정통과 이단 사이의 벽이 선이 얼마나 엷은지, 많은 종교가 서로 얼마나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종교는 (중략) 어떤 시대든 형이상학적 차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질병, 불행, 가난, 굶주림에 주목했다.” 질병을 치유하고 가난을 해결하며 불행을 해소하는 부분에 이르면 모든 종교는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가령,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같은 황금률이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종교가 인류의 영원한 갈증에 생명의 물을 어떻게 붓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2017. 01. 20)

제10장은 타고르의 이야기다. 이 장의 중심 질문은 "우리는 편견을 넘어서서 의견이나 생각의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타고르는 이 질문을 다루는 데 적합하다. 그는 비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버틀란트 러셀과 같은 서양인들에게는 모호한 소리를 늘어놓는 신비주의로 여겨졌고,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인도인들에게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자 르네상스의 주창자"였다. 

타고르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양자가 서로의 장점을 학습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바랐다. 그는 학교를 세워서 "동양과 서양이 결합된 결실"을 학습하고 또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항상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결실은 영국인 제자인 엘름허스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타고르 학교를 찾아온 이방인 엘름허스트는 타고르의 진정한 정신적 동반자였으며, 영국에서 돌아가 다팅턴 교육농업 실험을 진행한 선구자였다.

새로운 사상은 이질적 생각의 만남으로부터 나오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간다. 젤딘은 말한다.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는 한 살아 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반박하는 과정이다." 진부함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질성을 수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낯선 것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통합하는 과정에서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요청된다. 이것이 우리가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2017.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