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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거예요 _올리버 색스 1주기 추모글 올리버 색스 1주기에 맞추어 추모글을 하나 썼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대한 글입니다. 왜 저는 올리버 색스의 편집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이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고, 이후로도 많은 책을 챙겨 읽었는데요. 왜 끝끝내 독자로만 남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래에 그 사연(^^)을 옮겨 둡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던 거예요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조석현 옮김, 알마, 2015) 아주 이상한 일이죠. 닿을 수 없는 신비, 손댈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할까요.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 그러니까 사랑하지만 침대를 같이 쓰고 싶지는 않은 사랑이에요. 읽어서 마음에 닿으면 직접 손으로 문장을 붙잡고, 머리로 형태를 떠올리고, 입으로 동네방네 떠들고, 발로 친구들을..
[서울도서관] '책, 공동체를 꿈꾸다展' 읽기는 행복한 인생에는 풍요를 부풀리고, 허무한 인생에는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창작자가 아니라 수용자가 연주하는 유일한 예술이자 신비로운 공연으로서 삶의 높이와 깊이를 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점점 읽기의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긴 글을 깊이 읽는 문화는 반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위기는 오직 읽기를 통해서 쌓아올린 정신의 힘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 현장을 떠나면서 읽기를 퍼뜨리는 것을 저의 남은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한국일보》와 책사회가 함께 진행하는 기획 ‘책, 공동체를 꿈꾸다’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랫동안 같이 책을 읽어온 분들을 만나서 ‘읽기의 참된 가치’를 확인하고, ‘같이 읽기’라는 운동을 통해 자발적 ‘독서공동체’..
작은 연결, 미래 출판으로 가는 법(기획회의 417호 여는 글) 기획회의 417호에 ‘여는 글’을 썼습니다.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고, 독자와 독자가 연결되며, 책과 책이 연결되는 사회에서 출판 비즈니스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길어야 10년 내외에 책을 둘러싼 미디어 지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면서출판 비즈니스의 새로운 모델들이 탄생하고 소멸할 것입니다.이런 시대에 출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질문을 작게 던져 보았습니다. 읽기와 쓰기의 가장 간단한 연결을 생각하자. 나는 작문을 하고, 선생님은 읽는다. 벌써 여기에서 연결의 세 가지 기본 항이 생겨난다. 먼저, 발신자인 ‘나’라는 노드와 수신자인 ‘선생님’이라는 노드, 선생님과 나를 연결하는 ‘링크’다. 간단한 연결이지만, 이 연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링크’의 성격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링크..
당신의 독서동아리는 어떤 유형인가요? _김은하의 『처음 시작하는 독서동아리』(학교도서관저널, 2016) 산 속에서 혼자 읽는다 하더라도, 책 읽기는 ‘내가 아닌 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 만나는 경험입니다. 책 읽기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체험이지요. 함께 읽기는 내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다른 독자와의 만남이라는 이 새로운 차원은 흥미로운 세계를 열어 줍니다. 책의 세계라는 ‘타자’에, 나 아닌 독자라는 ‘또 다른 타자들’이 더해지기 때문이지요. 같은 책인데도 사람들마다 읽으면서 떠올린 생각, 느낌, 경험, 질문이 조금씩 다릅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읽힙니다. 사람마다 어떤 책을 읽어 왔는지, 책이 어떻게 각자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달라집니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사는 동료로서 서로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기도 하지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구나..
[2015년 출판 트렌드] 책에서 길을 묻다 _ 독(獨), 전(錢), 협(協), 리(理), 의(意) (시사인) 트렌드란 무엇인가? 과거가 기록한 미래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흐름이고 연속이어서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록은 오직 미래의 임무다. 과거는 기록할 수 없다. 기억할 만한 미래는 흔히 파괴이고 단절이며 전환의 형태를 취한다. 과거를 들여다보아도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유다. 미래는 미리 오지 않고 나중에 도래한다.창조자나 혁신가는 트렌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이 미래를 발명하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힘들에 주목하고, 힘들이 하나의 장(場)을 이루는 현실을 분석한다. 문제를 도출하고 해결책을 깊게 고민한다.출판은 고객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솔루션 비즈니스의 일부다. 어떤 특정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 사람들은 검색하거나 대화하는 대신 책을 읽는다. 올..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8> 패랭이꽃 버스에서 틔운 꿈, 그림책 도시 향해 달려요(원주 ‘그림책 연구회’) 패랭이꽃 버스에서 틔운 꿈, 그림책 도시 향해 달려요원주 ‘그림책 연구회’ 자녀들에 훌륭한 책 읽히려고박경리 선생 사랑방에서 첫 발읽기 모임 10년 만에 전국에 확산“어른들도 즐기는 도서관 꾸미자”전국에서 일흔다섯 명 의기투합사회적 기업 그림책도시 프로젝트 “어른들이 보기에는 어렵지만,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는데, 깔깔거리며 어느새 한계를 넘어서는 거예요.”모임 장소로 들어서니 이미 토론에 힘이 붙었다. 원주시 단계동 주공아파트, 지은 지 서른 해가 넘은 전통 있는 아파트다. 건물은 다소 낡았지만 숲을 이룰 정도로 풍성한 나무들이 주변을 감싸서 아늑하고 시원했다. ‘그림책 도시’라는 로고가 붙은 현관 문턱을 넘어서자 다른 책 하나 없이 오직 어린이그림책만 ..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7> 공무원들 7년째 독서모임 "시민 목소리에 더 공감하게 됐어요"(김해 행복한 책읽기) '책읽는 도시' 선포 계기로 첫 모임인사고과 혜택 없어도 자발적 참여직급 다양하지만 독서토론 땐 평등"살아갈 힘도 얻고 업무에도 도움" “이 책 표지를 볼 때마다 상당히 불편했어요. 지난달 말에 사무실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한 남성 직원이 의자를 밀치는 등 저한테 폭력을 행사했는데도, 조직이 워낙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저에 대한 배려 없이 그까짓 일은 아무 일 아니라는 식으로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저 개인적으로, 또 우리 조직에 대해 모멸감을 엄청나게 느꼈습니다.”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결국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오늘의 ‘행복한 책’은 김찬호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이다. 감정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특히 한국사회는 모멸을 서로 ..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산장에 밤비는 내리고 고조기(高兆基, ?~1157)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렸는지시냇물소리 한 자락 베갯머리 서쪽으로 흘렀네.새벽에 뜰 앞의 나무를 쳐다보니잠든 새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았구나. 山莊雨夜 昨夜松堂雨,溪聲一枕西.平明看庭樹,宿鳥未離棲. 맑고 깨끗한 시입니다.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글자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눈으로는 새벽 풍경이 선연히 보이고 귀로는 물소리도 들려오니 저절로 감탄이 돋습니다. 시골의 새벽은 새소리로 가득합니다. 소쩍새, 부엉이 같은 밤새들 울음이 잦아들 때쯤이면, 닭이 울어 젖히고 낮새들이 서둘러 일어나 벌레 잡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려시대 시인 고조기가 맞은 이 새벽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풀벌레조차 울음을 잊은 듯 적막합니다. 그때, 시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