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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2015년 출판 트렌드] 책에서 길을 묻다 _ 독(獨), 전(錢), 협(協), 리(理), 의(意) (시사인)



트렌드란 무엇인가? 과거가 기록한 미래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흐름이고 연속이어서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록은 오직 미래의 임무다. 과거는 기록할 수 없다. 기억할 만한 미래는 흔히 파괴이고 단절이며 전환의 형태를 취한다. 과거를 들여다보아도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유다. 미래는 미리 오지 않고 나중에 도래한다.

창조자나 혁신가는 트렌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이 미래를 발명하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힘들에 주목하고, 힘들이 하나의 장(場)을 이루는 현실을 분석한다. 문제를 도출하고 해결책을 깊게 고민한다.

출판은 고객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솔루션 비즈니스의 일부다. 어떤 특정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 사람들은 검색하거나 대화하는 대신 책을 읽는다. 올해도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고, 독자들은 한없이 책에서 길을 물었다. 읽기로만 해결할 수 있는 고유한 갈증이 있고, 읽은 책을 통해 우리의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독(獨) ― 미움받을 용기에는 미움이 없다 

만인과 만인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홀로’ 살아간다. 연결이 연대를 파괴한다. ‘좋아요’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은 ‘나’를 ‘나-당신’으로 만드는 것, 즉 타자와 삶이 얽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에는 얽힘이 없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해지하고,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뿐이다. ‘좋아요’가 사랑을 대체한 세계에서 사랑을 다시 발명하려는 투쟁(한병철, 『에로스의 종말』)은 우리의 윤리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립해서 단독자로서 살지 못하고, 자본의 은혜에 밥줄을 위탁한 채 자기모멸에 길들어가는 프레카리아트(바우만, 『도덕적 불감증』)로 살아간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에 타인조차 사랑할 수 없어진 무도덕 사회에서는 사람이 일단 몸부터 웅크린다. 세상의 폭력을 등으로 견디면서 내면의 두께를 이룩하려고 몸부림친다. 덫에 걸린 짐승 같다. 기시마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인플루엔서)가 예스24에서 40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이 분야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위즈덤하우스), 쑤린의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다연),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등도 나란히 뒤를 쫓았다. 

‘미움 받을 용기’에는 ‘미움’이 없다. 미움에 눈감을, 타자를 신경 쓰지 않을 ‘용기’만 있을 뿐이다. 타자의 사막화는 곧 사회적 지옥의 강화다. 우리는 이 정도로 절박하다. 세계는 온통 절망과 불안뿐이고 앞길이 잘 보이지 않으니, 조난당한 선원처럼 목을 축이려고 일단 바닷물을 퍼마시는 중이다. 그러나 행복은 심리학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문제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니라 ‘미워할 용기’가 필요하다.


전(錢) ― 돈의 재난이 눈앞으로 다가오다

‘돈의 진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알키), 『부자언니 부자특강』(세종서적) 등 재테크 서적이 눈에 띄게 팔린다. 재태크 열풍은 늘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증거다. 돈에 거품을 일으켜서 위기를 조장하는 자본의 고질이다. 자본은 항상 ‘재난 자본’으로 역사에 등장한다.(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인위적으로 재난을 일으켜 세계를 황폐화한다. 버블을 키워서 붕괴시킨 후 널브러진 자산을 헐값에 매입해 수익을 극대화한다. 재테크는 정상 노동을 통해서는 삶의 질조차 유지할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재난의 발현이면서, 다가올 경제 쓰나미의 징후이기도 하다.

재테크 멘토들은 ‘열풍’ 이전에 필요한 곳을 점유한다. 그들은 이미 이기고 난 후 책을 내서 다시 싸운다. 책을 읽고 전장에 나서려는 이들은 벌써 패배한 것이다. 재테크는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남의 재테크를 돕거나 재테크 자체를 소비하는 데 그칠 뿐이다. 돈을 좇는 자는 이길 수 없고, 이기는 자는 돈을 좇지 않는다. 돈으로 돈을 버는 ‘머니게임’은 자본이 버블을 일으키려고 사람들한테 불어넣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 진격한 사회는 인간적 가치가 무너지고 일상의 즐거움이 증발한 사회다.


협(協) ― 자발적 가난에 근거한 삶을 요청하다

‘돈’이 진격한 세계, ‘머니 자본주의’ 사회의 삶은 우울증과 신경증과 산만함으로 요약된다. 돈을 벌지 못하면 불안하고 우울하다. 돈을 조금 벌면 쫓겨날까 신경이 곤두선다. 돈을 많이 벌려면 바빠서 정신이 없다. 어느 쪽에도 행복은 없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또 다른 삶의 형식을 조금씩 발명해 간다.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동아시아)가 불러온 열광은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 서로 협동을 이루면서 자연과 조화하는 삶에 대한 현대인들의 깊은 갈망을 드러낸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에 이어진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의 나란한 성공은 지금 이 순간 우리한테 소박하면서도 유쾌하며 자기 파괴적 소비를 최대한 배제하는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잘 보여준다.

많이 벌어 많이 쓰자는 탐욕의 삶은 결국 지구를, 사회를, 인간을 파괴한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재앙은 고에너지 사회의 종언을 확증한다. 주변의 자연을 이용해 에너지를 자급하는,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사회, ‘자발적 가난’에 근거한 삶을 긴급하게 요청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우애와 협동의 연습이 필수다. 마사 누스바움의 『감정의 격동』(새물결)을 비롯해서 타자와 공감을 성찰하는 인문학 서적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것을 예사로만 볼 수 없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보고되는 것도 같이 주목할 만하다.


리(理) ― 과학이 시민적 사유의 지평선 위로 뛰어오르다

사회 생물학의 등장 이후, 현대 과학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통찰을 끊임없이 제공해 왔다. 과학이 진짜 인문학이라는 말은 어느새 중요한 상식이 되어 버렸다. 『김대식의 빅퀘스천』(동아시아)을 보라.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들이 과학과 함께 얼마나 새롭고 경이롭게 탐구되는지. 과학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동시에 기적을 일으킨다. 끔찍한 상상이자 무한한 축복이다. 

오늘날 과학을 모르고 제대로 시민답게 살기란 불가능하다. 메르스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바이러스나 감염에 대한 지식 없이는 사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자칫하면 공포와 혼란을 전달하는 어리석음의 숙주가 될 뿐이다. 지식은 진화한다. 우리 자신이 놓인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어나 역사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과학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본능으로 안다. 이정모의 『공생, 멸종, 진화』(나무, 나무), 김범준의 『세상 물정의 물리학』(동아시아), 진주현의 『뼈가 들려준 이야기』(푸른숲), 이상희, 윤신영의 『인류의 기원』(사이언스북스), 대니얼 대닛의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동아시아), 랜들 먼로의 『위험한 과학책』(시공사) 등 과학은 시민적 사유의 지평선 위쪽으로 점차 높이 뛰어오르는 중이다.


의(意) ― 삶으로 글을 짓고 글로써 삶을 발견하다

제목 그대로 넓고 얕다. 21세기판 『철학 에세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것도, 돌아갈 때조차 건너뛰는 것도 비슷하다. 세계에 이성의 빛을 던져보려는, 혼돈으로부터 의미를 건져 올리려는 시민적 열정이 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 이야기다. 당연히 넓고 얕은 물에서는 오래 헤엄칠 수 없다. 인문은 입문에만 머무를 때 곧바로 실용으로 퇴보한다. 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수다로 전락한다. 소셜미디어에 쏟아 붓는 말처럼, 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방만 바꾸는” 거대한 공허를 되받을 뿐이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고 무의미로 얼룩져 있다. 예수도, 붓다도, 공자도 현세를 고통의 땅으로 깨달았다. 이들이 ‘미움 받은’ 것은 삶이란 본래 행복하다는 범인들의 달콤한 환상마저 철저하게 깨부순 탓이다. 얼어붙은 사유의 바다를 도끼로 내려쳤기에, 공자는 상갓집 개처럼 외면당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세상에는 도저히 행복이 없기에, 고통 자체로부터 의미를 발굴하려는 내적 추구는 인간의 정직한 본성을 이룬다. 

좋은 책은 행복을 이야기하는 말을 거짓으로 고발하고, 고통 속에서 소리를 잃어버린 입들에게 입술을 대여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체르노빌의 목소리』(새잎)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는 그 장엄한 증거를 이룬다. 『담론』(돌베개), 『시의 힘』(현암사) 역시 세상의 바다를 헤엄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글(고전)에 낚싯줄을 내렸지만, 낚아 올린 것은 생의 지혜다. 삶으로써 글을 짓고 글로써 삶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순환이 거기에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는 ‘좋은 죽음’ 없이 어떤 삶도 행복을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그리스적 지혜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다.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소포클레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루터의 예를 들면서, 혁명은 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고쳐 쓰고 싶은 세계다. 자, 그러니, 자신과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삶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다면 무엇을 읽을 것인가.


* 시사인 별책부록에 실린 글을 여기에 옮겨 둡니다. 아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