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17호에 ‘여는 글’을 썼습니다.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고,
독자와 독자가 연결되며,
책과 책이 연결되는 사회에서
출판 비즈니스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길어야 10년 내외에 책을 둘러싼 미디어 지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면서
출판 비즈니스의 새로운 모델들이 탄생하고 소멸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출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을 작게 던져 보았습니다.
읽기와 쓰기의 가장 간단한 연결을 생각하자. 나는 작문을 하고, 선생님은 읽는다. 벌써 여기에서 연결의 세 가지 기본 항이 생겨난다. 먼저, 발신자인 ‘나’라는 노드와 수신자인 ‘선생님’이라는 노드, 선생님과 나를 연결하는 ‘링크’다.
간단한 연결이지만, 이 연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링크’의 성격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링크의 성격이 숙제의 제출인지, 작품의 선발인지, 학예회 발표 자료인지 등에 따라 ‘쓰기’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또한 나의 문장, 지식, 경험, 취향 등이나, 선생님의 성향, 교수 내용, 학교 분위기, 행동 등에 따라서도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단순히 훌륭한 콘텐츠의 ‘제작’과 ‘제출’을 목표로 하는 것만으로는, 이 단순한 연결조차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물론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에, ‘직관적으로도’ 우리는 이 일을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고, 좋은 학점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관계를 분석해 보면, 이 단순한 연결에서조차도 인풋과 아웃풋을 비례관계로 만드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강의, 대화, 족보 등을 통해 오랫동안 축적한 무의식적 데이터, 콘텐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공부와 구상,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고도의 물리적 훈련 등이 순간적으로 결합하는 기적이 없는 한 좋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물며 우리는 좋은 결과를 얻는 데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던가. 기말 성적표는 얼마나 많이 우리를 좌절시키는가.
출판을 둘러싼 연결은 이러한 단순 연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출판 비즈니스는 그동안 기획, 제조, 배본, 홍보, 판매 등 책의 가치 사슬에서 고도 분업을 활용한 공정 혁신을 통해 각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이 과정을 처리해 왔다. 요약하면, 출판사는 저자의 발견과 콘텐츠 고도화를 통해서, 서점은 독자의 발견과 서비스 고도화를 통해서 독자의 욕구를 충족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책이라는 상품 자체에 대한 물신숭배를 불러일으키면서 저자나 독자의 목소리를 배제해 온 과정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사물에 고착된 출판사와 서점의 메시지가 퍼뜨려진 것이지, 책을 둘러싸고 자유롭게 생성되는 저자나 독자의 메시지는 현실적으로 전혀 교환되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 출판산업은 저자의 원고를 재료로 삼아서 가공한 물리적인 책을 통해 ‘독자 대중’을 관리함으로써 사업 실패율을 낮추어 온 셈이다.
그러나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고, 독자와 독자가 연결되며, 책과 책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에서는 책을 둘러싼 전혀 다른 규칙이 출현한다. 기존의 경로 의존성이, 빠르든 늦든 간에, 철저히 파괴되면서, 개별 기업의 가치가 소실될 뿐만 아니라 산업 자체의 가치조차도 소멸되는 경우가 빈번히 생겨난다. 기존의 가치 사슬이 완벽하게 무너지고 재구축되면서, 출판은 여러 비즈니스 모델들이 공존하는 ‘출판들’로 진화할 것이다.
합병을 통해 세계 최대의 학술 출판사가 되어 버린 스프링어네이처의 최고경영자 더크 한크는 2040년까지 출판산업의 미래를 예측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의 단기적 변화 양상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이것은 출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오늘날 출판의 첫 번째 과제는 읽기와 쓰기가 만나는 새로운 모델, 책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나름의 솔루션을 찾는 일이다.
오가닉미디어랩의 윤지영 대표의 논의를 빌리면, 출판 진화의 출발점은 일단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콘텐츠 자체의 혁신력’이다. 독자의 시간을 줄여 주고 가치를 높여 주는 확실한 콘텐츠는 정보의 가치가 0로 떨어지는 초연결사회에서도 여전히 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작은 연결’을 소중히 여기면서 이를 기반으로 해서 회사 자체를 차분히 진화시켜 가는 일이다.
작은 연결을 통해서 독자의 반응(데이터)을 모으고, 반응(데이터)에 따라 자기만의 사업 모델을 이룩해 가는 출판만이 결국 미래의 출판사로 남을 것이다. 자, 이 일을 누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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