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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에 쓰인 _ 헤르만 헤세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 단지 한 번의 입김이고 전율일 뿐이라는 것 값지고 황홀한 것이 잠깐의 우아함이라는 것 구름, 꽃, 비눗방울, 불꽃놀이, 아이들의 웃음, 유리 거울 속 여자의 시선 그리고 많은 경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발견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라는 것 그저 향기이며 바람의 흩날림일 뿐이라는 것 아,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략) ​ 그래, 지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은 쇠락하는 것에 끌린다. 가장 값진 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음악의 소리, 생겨남과 동시에 이미 떠나가고 사라지는 음악의 소리는 그저 흩날리고 흘러가고 뒤늦게 따라가면서 나직한 애도의 기운에 싸여 있다. (중략) ​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
은유 은유(metaphore)는 우리의 앎을 너머(meta-)로 옮기는(perein) 언어다. ​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면, 그 바깥에는 언제나 은유가 있다. 앎이 쌓여서 새로운 앎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은유가 일으키는 신비, 은유를 통해 언표된 앎, 은유에 이끌리는 호기심이 우리의 인식을 이끈다. 인식은 은유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시가 있는 한 현실은 혁명 된다.
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
인생이란 비오는 한밤중에 다리를 건너는 것 건너는 사람 여태천 정말로 뭔가를 보지 못할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일 뿐 사람들은 어서 여기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칠흑의 이 밤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누군가 또 다리를 건너나 보다. 이런 밤이면 인기척도 무섭다. 폭우로 불어난 물 때문인지 재난방송이 간격을 두고 울린다. 선한 의도가 때론 누군가의 목줄을 죄고 지금의 기쁨이 십 년 뒤의 후회가 될 수도 있는 법. 떠나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흙탕물은 단비가 되어 어딘가에 내리기도 하겠지만 이번 삶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텅 비어 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맞는다. 다리를 건너는 저 사람도 필경 우산이 없을 것이다. 젖을 대로 젖어서 건너는..
고독에 대하여 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은 비와 같다. 고독은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오른다. 고독은 아득한 외딴 평원에서 언제나 고독을 품어 주는 하늘로 향한다. 그러다 비로소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동틀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고독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 ==== 이 시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김재혁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에 실려 있다. 고독은 초기부터 릴케 시의 핵심 개념이었다. 1902년 스물일곱 살의 릴케는 낯선 도시 파리에서 이 시를 썼다. 릴케에게 파리는 눈부시게 황홀한 예술의 낮과 소외감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고독의 밤이 ..
시와 지성 (보들레르) 오래전 나는 시인이 더할 바 없이 지성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시인은 지성 그 자체이고, 상상력이 [정신의] 기능들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라고 한 적도 있다. 상상력만이 보편적 유추 또는 신비 종교에서 교감이라고 부르는 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_보들레르 =====아무렴!!!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가장 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형태라는 걸 모른다면, 시를 쓰는 건 고사하고 읽을 수조차 없다.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건져올린 기쁨의 언어 배수연의 첫 시집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는 폭력으로 가득한 슬픔의 세상에서 ‘기쁨’의 언어를 발굴하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마음을 담았습니다.세상의 표상은 더럽고 위협적입니다. “헝클어지는 머리칼/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엄살쟁이야/ 주사 맞기 싫으면/ 선생님 뺨에 입을 맞춰 봐” 시 「병원놀이」의 한 구절입니다. 이 땅의 여자들이 흔하게 겪는 일상을 생생하게 포착합니다.하지만 시인은 세상의 폭력에 지지 않습니다. 폭행하는 세계 속에서 시인은 곳곳에서 자아의 기쁨을 흩뿌리고 또 수확합니다.“너의 아름다운 몸이 침대 위에서도 웅크려야 하는지/ 나는 와락 눈물이 안기는 걸 뿌리친 채로/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눈썹을 꺼내 네 발에 시를 썼어/ 아니 그건 코란이나 성경이었을지도 몰라”이 시집..
한국의 문학 독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한국의 문학 독서는 어떤 상황일까요. 모두들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문학은 정말 위기에 빠졌을까요, 아니면 이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엄살일까요. 독서에 관한 최근 조사연구들을 종합해서 한국의 문학독서 실태에 대한 지도를 그려보았습니다. 문학이 위기에 빠졌다면 말로 문학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정확한 조사연구부터 행해야겠지요. 본격적인 조사연구가 있기 전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 이 글은 《씀》 4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씀》은 전위문학의 잡지이지만, 전혀 이질적인 이 글을 실어 주는 아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편집진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문학 독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솔직히 고백부터 하자. 한국에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문학을 읽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