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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롤프 디터 브링크만

어느 순간에는 단지 시간을 느리게, 천천히, 흘러가도록 늘이는 것만으로 시(詩)가 된다. 

한 처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단순한 그림」(이유선 옮김) 전문

한 처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눈처럼, 만약 일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면, 그 순간 바로 시의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손에
칼을 들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는 올 것이다
우연히 지나다 시간을 묻는
누군가처럼, 
그는 다가와 모자 벗고 인사를 할 것이다.

천구백육십삼년
이월 십일일, 정각 
열한시가 지난 직후, 아침에
조망도 좋지
않고, 별로 
빛도
들지 않는,
내 방으로, 엥겔베르트가
사층에 있는.
그리고 그는 올 것이다
그는 미터기와 가스를
읽을 것이다

그는 
문을 닫을 것이다, 예의 바르게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누군가처럼.
_ 롤프 디터 브링크만, 「나의 죽음에 대한 단순한 생각들」(졸역) 전문

브링크만의 시를 읽으면 아름다움이란 인간을 침묵시키는 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는 것, 시간이 너무 느려져 우리의 인지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 그 감각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애쓰는 마음이 시를 낳는다. 브링크만은 말한다. 

"저항은 침묵 능력에서 시작한다. 침묵은 무언의 상태이다. 정말로 무엇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시는 하나의 능력이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