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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모래 위에 쓰인 _ 헤르만 헤세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

단지 한 번의 입김이고 전율일 뿐이라는 것

값지고 황홀한 것이

잠깐의 우아함이라는 것

구름, 꽃, 비눗방울,

불꽃놀이, 아이들의 웃음,

유리 거울 속 여자의 시선

그리고 많은 경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발견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라는 것

그저 향기이며 바람의 흩날림일 뿐이라는 것

아,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략)



그래, 지고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은 쇠락하는 것에 끌린다.

가장 값진 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음악의 소리, 생겨남과 동시에

이미 떠나가고 사라지는 음악의 소리는

그저 흩날리고 흘러가고 뒤늦게 따라가면서

나직한 애도의 기운에 싸여 있다.

(중략)



그런 우리에게는 장미 이파리의 이슬이

한 마리 새의 구애가

구름이 희롱하는 죽음이

흰 눈의 반짝임과 무지개가

이미 날아가 버린 나비가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지나는 길에 우리를 잠시 스친 그 소리가

환희를 선사하고

고통을 주나니,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와 하나인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바람이 모래 위에 써놓은 것을.

_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김윤미 옮김(북하우스, 2022) 중에서



=====



이렇답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피어났다 지는 꽃들을,

바람이 모래 위에 써 놓은 글자들을

사랑하는 하루가 되시길.....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쓴

음악 관련 글들, 시들을 묶은 책입니다.



괴테도 마찬가지이지만,

헤세의 문학에

음악이 끼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최후의 걸작 『유리알 유희』는

사실 음악이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이 시는 다음 산문과 서로 조응합니다.



아름다움의 마법은 얼마간 덧없음에서 나온다. 이 마법과 황홀경 또는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일상의 시간으로 따져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느 연주회의 휴식 시간」 중에서)



연주회와 연주회 사이 낡은 연습용 피아노로 바흐의 평균율을 치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연주자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



번역자인 김윤미 선생은 익숙한 이름이 아닌데, 좋은 번역자인 것 같습니다. 문학/음악을 함께하시는 듯한데, 독일 쪽 음악을 많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김윤미 옮김(북하우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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