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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편집일은 좋아도 출판사는 싫은 당신에게 _생활인문잡지 《WAY》 창간호를 읽다




편집일은 좋아도 출판사는 싫은 당신에게



편집 일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잘된 작업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 교정교열은 책을 읽을 독자 입장에서 의문부호를 없애는 일이기 때문에, 잘 교정된 책에서 편집자는 보이지 않는다.


생활인문잡지 《WAY》 창간호에 실린 봄알람의 편집자 이두루의 글 「일은 좋아도 회사는 싫은 당신에게」에서 읽었다. 편집노동에 대한 정확하고 아름다운 정의다.


편집자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많는 전문성과 지식이 필요하지만 생각보다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많은 업종의 회사에서 그렇듯, 결정권자와 실무자는 따로 있고, 실무자의 노동 결실은 회사의 성취로 수렴된다. 실무자의 노동가치를 제대로 보고 대우하며 개인을 키우는 토양이 되어 준다면 좋겠지만, 일을 할수록 그런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략) '일 잘한다'는 말을 들을수록 회사에 딱 맞는 소포품이 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기에 무시되기도 쉬운' 편집노동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보고다. 회사의 성장이 편집자(직원)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국 출판의 어떤 구조에 대한 강의(이른바 오답출판 강의)를 막 끝마친 셈이라 더욱 쓰라렸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 두고 싶다. 당연히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사실, 이 문제는 가족주의에 함몰되어 성장기 출판계에서 희망의 구조를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스러지고 있는 부동산형 출판경영과, 이른바 생존선을 넘은 후에도 장인주의에 빠져서 자율적 편집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직원을 키우지 않는 길드형 출판경영에 대한 구조적 성찰을 병행할 때 더욱더 생생해진다. 

출판계 선배로서 길을 열어주지 못한 마음이 미안하고 참담하고 부끄럽다. 친구들과 출판사를 차려서 좋은 모델로 잘 꾸려가는 듯해서 다행이다 싶다. 강의할 때 가끔 소개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젊은 출판사(봄알람)가 일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나중에도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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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생활인문잡지 《WAY》 창간호.... 나는 이런 잡지들을 무척 사랑한다. 기회 닿을 때마다 챙겨 읽으려 한다. 깨어진 알에서 갓 나온 투쟁들이 서툴지만 신선한 언어들을 파생시킨다. 새로운 필자가 탄생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한 사람의 편집자로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활인문"이라니? 이게 도대체 뭐야!!!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무슨 뜻인지 무척 궁금했다..... 아무데나 인문을 갖다 붙이는 게 하도 유행이라서 어떤 이념적 지표를 가지고 이 말을 사용하는지, 이 말로써 어떤 실체를 일으키고 어떤 유령과 싸우려 하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ㅜㅜㅜ 발간사를 읽어 봐도, 표지를 찾아봐도 아무 언급조차 없다.^^;;; 

설마 세대 차이.... 다들 이런 말쯤은 의미 규정 없이도 쓸 수 있는 거야. ㅜㅜ 황급히 검색까지 했는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나중에 보도자료에서 찾아낸 말은.... 


먹고 입고 자는 우리의 일상에 관심을 갖는 친절한 인문에 대한 상상.


하지만 그전에 실린 글을 하나씩 읽다 보니 젖어들듯 마음속에 떠올랐다. 성찰적 일상. 그렇다면 내 기준으로는 에세이 잡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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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북스 황남희 대표의 글 「책등에 매달린 친절」도 흥미롭다. 사실, 난 책과 책방과 출판 이야기는 다 흥미롭다. 이 부분 정말 훌륭하다. 일상의 디테일에 언어의 갈고리를 걸어 드러내는 사유의 섬광들. 난 이런 글은 잘 못 쓰니까, 괜히 부러워한다.


나는 작은 책방을 꾸리고 있고 대부분의 책은 손수 고른 책들이라 (보이진 않겠지만) 책 한 권 한 권에 나름의 친절을 심어 두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책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만날 수 있다. 친절은 책을 정리하는 내 손끝에 달려 있기도 하다. 테이블을 닦는 주방 행주에도 묻어 있다. (중략) 책등에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중략) 사실 거의 보이지도 않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작고 소심한 녀석들은 굳이 말해 줘야 한다. 동네 작은 책방 같고, 홀로 고군분투하는 독립출판물 같고, 흔들리는 페이지 같고, 페이지를 넘기는 익숙한 손길들 같고, 촘촘한 단어들 같고, 그 단어가 주는 울림 같다. 그곳에 가지 않고는, 읽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그런 친절이 있다. 


봄알람이든, 이후북스든, 《WAY》든,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다. 창간호는 텀블벅을 이용해 출판한 모양인데, 《WAY》가 독자들 사랑을 받아서 이런 글들을 계속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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