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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한 걸음 앞으로, 영원한 혁명을 향하여 ― 사사키 아타루의『제자리걸음을 멈추고』를 읽다

지난 한 달, 사사키 아타루의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를 틈을 내서 두 번 읽었다. 마음에 드는 책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끌리는 책은 “마지막 장까지 읽자마자 서두로 되돌아가서 한 구절을 읽는” 식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으니까. 이 영감 넘치는 책에 대한 작은 글을 적어 아래에 옮겨 둔다.  




한 걸음 앞으로, 혁명을 향하여

사사키 아타루,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를 읽고



여러분, 소리 높여 말하세요.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있어야 할 대학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좋은 교양주의이며 연구와 교육의 일치다, 즉 전공만이 아니라 전 인격을 도야하는 지(知)의 집단적 행위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학의 자치이고 ‘고독과 자유’라고.


공부로 무장한 반항. 깊이를 갖춘 발랄함. 

사사키 아타루의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를 읽은 첫 느낌이다. 솔직히 나는 이 젊은 철학자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사사키의 책은 모두 읽었다. 공  없는 반항은 야하고, 반항 없는 공부는 속되다. 후자보다 전자가 낫지만, 문과 무를 골고루 갖춘 필자를 생시에 만나는 것이 ‘편집자의 꿈’ 아니겠는가. 사사키의 글에는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격렬한 발랄함이 있고, 또한 철학을 도구로 쓰면서 발생하는 웅숭깊음이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 도쿄대학 총장이지요. 그는 총장 시절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략) ‘철저히 근대국가의 성립과 불가분한 제도로서의 19세기적인 대학을 기점으로’ 해야만 한다고. (중략) 19세기의 첫해에 성립한 훔볼트 이념에 기반을 둔 대학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도 안 되죠. 이 19세기적인 근대대학이 얼마나 급속도로 체제에 굴복하고 타락했는지, 그리고 나치에, 파시즘에 얼마나 어이없게 굴복했는지 우리는 똑똑히 봤으니까요. 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유보도 없이, 아무런 대책도 궁리하지 않은 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중략) 뼛속까지 길들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직무상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시즘에 굴복하는 것 아닙니까.


철학자 뫼르소. 

사사키 아타루는 가볍게 툭툭, 던지는 말에서도 철학적 예민함을 견지한다. 나는 이 무례한 솔직함에 깜짝 놀라면서, 또한 그 솔직함이 마음속에 남기는 파문의 힘으로 인생을 반추하곤 한다. ‘나는 하스미 시게히코다. 일상의 파시즘에 길든 짐승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언어의 정치성을 성찰하지 못할 때, 역사적 ․ 상황적 맥락에서 언어를 도려낼 때 우리는 하스미 시게히코처럼 자신도 모르는 파시스트가 된다. 훔볼트가 만든 교양대학, 한국의 인문대학 교수들도 틈만 나면 입에 거품을 무는 “전공만이 아니라 전 인격을 도야하는 지(知)의 집단적 행위”를 추구하고, “대학의 자치”와 학자의 “고독과 자유”를 통해 그 행위를 보장받는 이 대학은 순식간에 국가주의의 요람이 되었고, 결국에는 나치의 온상이 되었다.


나치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손쉽게 대학을 길들였습니다. 그래서 교수와 학생은 희희낙락하며 좌익과 유대인을 박해하고 추방합니다. 독일의 대학은, 그리고 훔볼트 이념에 입각한 근대대학은 이때 붕괴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패배입니까. (중략) 대학 따위 죽으면 그만입니다.


사사키의 글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공공연한 불온함이 있다. 그 불온함은 우리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파시즘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단호한 어조로 환기한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사사키가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결코 편하지 않다. 하지만 호기심인지 어쩐지 나는 자꾸 되돌아와 그의 글을 여러 번 읽게 된다. 대학 시절 이래로, 내가 공부해 온 것들과 사사키의 공부가 상당히 겹치기 때문일 수 있다. 니체, 푸코, 들뢰즈……. 그리고 문학.



2008년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2015)으로 사유의 밤을 환하게 밝히면서, 일본 출판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처음에 이 원고는 여러 군데 출판사를 전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사키의 학위 논문이기도 한 이 책의 출간을 편집자들이 망설인 데에는 아마도 낮은 저자 지명도와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분량이 원인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던가. 사사키가 자랑하듯, “스무 살 전후의 젊은 친구들이 단숨에 즐겁게 읽었다며 연락하곤 합니다.” 

오늘날의 출판현실에서 편집자는 데이터베이스의 명령에 굴복하기 쉽다.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책 자체가 미디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책은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이 독자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촉발’을 일으킬 수 있다. 사사키의 말대로, “그 정도의 기적은 세상에 흔하다.” 『야전과 영원』의 성공은 이를 보여준다. 

첫 책의 출간이 그다음 한 걸음을 만든다. 인간은 하나의 일을 해서 다음 일을 만드는 수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이후에 사사키 아타루는 파울 첼란의 시에서 제목을 빌려온 『잘라라, 기도하는 저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을 통해서 독서 대중이 주목하는 기예의 신진이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커다란 화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사키 아타루를 만났고, 크게 자극을 받았으며, 지금껏 공공연한 독자로 그를 응원 중이다.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는 ‘아날렉타’(analecta)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먹다 남은 음식, 즉 남은 것, 나아가서는 빠진 것을 보충하고, 가외로 얻은 종류를 가리키는 라틴어”다. 이 시리즈는 사사키 아타루가 강연, 기고, 수필, 서평, 대담 등의 활동을 하면서 남긴 흔적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이 시리즈에 속하는 『이 치열한 무력을』(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2013)과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6)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는 다소 특별한 데가 있다. 이 책에는 루터적인 활력이 있다. 갓 태어난 사상이 낡은 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요구하는 엄청난 활력이 넘쳐난다. 나중에 『잘라라 기도하는 저 손을』에서 비로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옆을 흘겨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 무모한 열정이, 그 결연한 결기가 아름다운 책이다.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서재길 옮김, 글항아리, 2014)와 같이 읽으면 좋은 ‘대학론’을 제외하면, 이 책은 두 가지 위험한 질문에 답하려는, 아니 답할 수 있다는 철학자다운 열의로 가득하다. 하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진정으로 심오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답하는 데로 이른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철학자도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를 동원하는 게 아닐까.

사사키 아타루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것은 옴진리교가 가져다준 충격 때문이기도 하고, 이 문제가 현대 철학의 거멀못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옴 진리교는 “너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기필코 죽는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라는 주문이 담긴 비디오를 이용해 신도를 협박하고 세뇌한 끝에 결국 사린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필사라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 우울과 허무를 불러들이지 않도록 하는 임무야말로, 즉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르게 답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20세기에 들어서 이 문제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끌어올린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죽음을 사유하다가 ‘민족’이라는 가짜 쾌락에 빠져 ‘나치주의’로 결국 떨어졌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죽는다. 전부 죽는다. 기필코 죽는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엄연한 우리의 자유로서 받아들이기로 각오하면 민족의 명운을 보전한다!” 나는 죽지만 민족은 영원할 수 있다. 그러니 나한테 주어진 자유를 이용하여 민족을 살리는 길로 나아가자. 시시한 이야기다. 하지만 또한 마력적이다. 우리도 한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개체는 반드시 죽지만, 개체와 생명을 함께하는 집단은 영원하다. 개체는 집단을 통해 ‘영원히’ 삶을 유지한다.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치다. 민족의 보전을 위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서슴없이 학살하는 무감각한 정신을 낳았다. 이것은 사유의 부패이자 타락이다.

하이데거의 그 절망적 타락을 넘어선 것이 모리스 블랑쇼다. 들뢰즈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한 사람”이라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다. 사사키 아타루는 말한다. 


“[하이데거의] 가장 강한 부분을 파괴해야 합니다. 어디일까요. 죽음입니다. (중략) 블랑쇼는 실로 이 명제를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기필코 죽는다’는 말에 ‘그게 정말이야?’라고 반문합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죽음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그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니까. 따라서 죽음에는 차안도 피안도 없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무한한 길을 걸을 뿐,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죽음이 없는 양 그 길을 간다. 우리의 삶이란 죽음을 향해 가는 무한한,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죽더라도, 내 육체가 주검으로 바뀌는 것일 뿐, 나는 그 사실을 말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내가 죽는 일은 없으니까 죽음에 흥분하고, 죽음을 향락하고, 죽음에 열광할 일도 없다.

모리스 블랑쇼는 죽음의 철학을 파괴한다. 우리의 관심을 생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정치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아니, 죽음의 철학을 파괴하는 것 자체가 가장 고도의 정치를 이룬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예비평가가 아니라 최고의 정치철학자인 것이다. 푸코도, 들뢰즈도, 르장드르도, 모두 블랑쇼를 사숙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스피노자나 니체와 마찬가지로, 블랑쇼는 죽음에 대한 관심을 삶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놓는다. 그로부터 또 다른 질문, 이 무한히 계속될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현대 철학에서 이 문제를 가장 생생한 언어로 표현한 사람 중 하나가 미셸 푸코다. 푸코는 ‘실존의 미학’과 ‘자기 배려’라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 발견함으로써 세속 혁명 이후 거의 잊혔던 ‘영성’의 문제를 다시 사유의 중심으로 데려왔다. 


“철학은 진리에 도달하는 조건으로서 인식만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영성은 진리에 도달하는 조건으로서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꾸기를, 금욕과 실천과 수련을, 미적이고 윤리적으로 다시 단련하기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성은 우리 삶의 총체적 변화를 요청한다. 촛불을 들어 타락한 권력을 추방하고 마음에 드는 대통령을 뽑았다고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권력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생활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반동이 개시될 것이다.

‘68 혁명’ 이후를 살아야 했던 푸코는 ‘자기 배려’ 또는 ‘실존의 미학’이라는 개념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성의 역사』에서 시작되는 푸코의 후기 철학은 온통 이 개념에 바쳐져 있다. 젊을 때의 나 역시 이 개념에 홀린 적이 있다. 자기 단련의 커리큘럼을 스스로에게 설정하고 매진하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 생각은 얼마나 대단했던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의 양식’ ‘저항의 미학’ ‘삶의 윤리’ 등등 비슷한 개념은 얼마든지 있다. 

푸코는 영민한 사람이다. ‘자기 배려’를 고민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을 금세 알아챈다. “‘자기 배려’는 “출세를 목적으로 친인척끼리 ‘인맥을 쌓는’ 계기이자 유한계급, 즉 상류층이 부를 과시하기 위한 ‘유행’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 배려’는 ‘구체적인 정치성’을 거세당할 때 ‘자기계발’로 타락하기 쉬운 개념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말한다. “자기 배려, 실존의 미학은 절대로 저항과 혁명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푸코는 ‘정치적 영성’이라는 말로 답한다.[각주:1]


‘정치적 영성’은 푸코가 이란 혁명에서 발견한 ‘봉기의 영혼’이자 ‘종교로 하여금 혁명적인 힘을 갖고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정치적 영성은 진정한 정치를 추구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곧 정치적 혁명에서는 삶 자체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영성은 위험한 개념이다. 정치적 진리의 내적인 가치를 끝없이 시험당해야 한다. 정치는 살아 있는 것이고,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영성에는 죽을 때까지 완성이 없고, 영원한 경계가 뒤따라야 하며, 자신이 퇴폐나 광신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극도의 긴장을 한없이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영성이란 절박한 것이다. 거의 외길이며, 더 이상 오욕을 견디며 살아갈 수 없기에 싸우는 것이다. 사사키는 말한다. 


“정치적 진리의 실천은 살아 있는 문체와 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문체는 무엇일까요? ‘당사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심정을 담은 것’입니다. 가령, 베케트는 (중략) 절박한 심정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분명히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어. 다른 길은 없었으니까. 엉뚱한 길로 가지 않았기를,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기 전에’라고요.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막막한, 가망이 없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심정을 담은 것이 문체이며 영성입니다. 이란 혁명에서 이란 국민들이 봉기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봉기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착취당할 텐데.” 


그렇다. 언젠가 작동을 멈추게 될 한 번뿐인 삶이다. 이대로 착취당하면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제자리에서 계속 걸으면서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결과를 생각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도박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 절박함을 더해서 사사키 아타루는 말한다. 


“이것은 도박입니다. 행여 변변찮은 편에 서 있을지라도 알 턱이 없습니다. 창작하는 사람 편에 서서 글을 쓰는 것은 알몸으로 지뢰밭을 내달리는 격입니다. 제 생각이 틀려서 다음 순간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적에게 감쪽같이 이용당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같이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한 걸음 앞으로, 혁명을 향하여! 



  1. 이 개념과 자기 배려의 관계에 대해서는 탐구가 더 필요한 듯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