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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정치가 슈뢰더를 만든 여섯 가지 인생 질문





정치가 슈뢰더를 만든 여섯 가지 인생 질문



“정책을 마련하고 정치를 행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정치가의 핵심 과제, 즉 의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에게 정치의 꽃은 선거전과 유권자와의 만남, 선전, 표를 얻기 위한 투쟁, 의견 교환이다. 정치적 결의문을 작성하는 것은 테크노크라트도 할 수 있고, 더 정확한 정보는 언론인도 가지고 있지만, 선거전을 치르는 것은 정치가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 선거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부엌이 너무 덥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리사가 되면 안 된다.”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자서전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처칠 등 소수를 제외하면 글 잘 쓰는 경우가 드물어, 차라리 평전을 선호하는 쪽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염현아, 박성원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7)은 어떨까. 회고의 기미는 거의 없고 단단하고 단호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마음에 와 닿는다. 이분, 아직도 은퇴하지 않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사민당 출신으로서 독일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 개혁을 밀어붙인 사람. 통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해 국내는 사분오열되고, 전범국가의 이미지로 인해 독일의 국제사회 이미지는 바닥이었다. 기존체제를 유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기에 총리가 되어 지지층 이반을 무릅쓰고 격렬한 내부 토론을 감수하면서까지 각종 개혁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던 결단의 정치가. 이것이 슈뢰더의 일반적 이미지다. 인의만 내세우는 야당의 정치로, 험난한 세파를 헤쳐갈 수 없다는 각성이 그 안에 있다. 슈뢰더 이전에 16년 동안 헬무트 콜의 보수정권이 유지되었으며, 다시 2005년 앙겔라 메르켈의 보수정권이 지금까지 집권 중이라는 현실도 함께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에, 몇몇 에피소드를 덧붙여보아도 가십에 불과하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슈뢰더의 인생을 이끌어간 여러 질문들’이다.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란, 결국 한 시대의 다양한 욕구들을 대답할 수 있는 형태의 질문으로 집약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마련하여 사람들을 설득한 후 그 대답이 현실에서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친아버지는 전쟁 중에 병사로 끌려가 죽고, 의붓아버지가 일하던 축구장 가건물에 얹혀살던 한 소년을, 고등학교 때까지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람’, 즉 우체국이나 철도청의 하위직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평범한 소년을, 고교 졸업 후 철물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동안 야간직업학교를 다니면서 공부에 매력을 느낀 한 청년을, 괴팅겐 법대에 다니면서 방학마다 공사장 인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와중에도 청년사회민주당 활동에 열중하던 사람을, 결국 독일의 총리로 만들고 통독 이후라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임무를 맡도록 한 것도 결국 이 질문들이 아니었을까.

“한 사회 안에서 왜 누구는 기회를 얻고 누구는 얻지 못하는가.” 이것이 자서전에 기록된 청년 슈뢰더의 첫 번째 질문이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공사장 인부로 일해야 했고, 원호청의 지원금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에 슈뢰더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일었던 68혁명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혁명의 질문을 청년사민당의 문제로 끌어안고 해석하면서 자신의 질문으로 만들었다. “나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이 현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68혁명에 참여한 새로운 좌파들과 사민당에서 활동하던 좌파 청년 사회주의자 그룹을 하나로 묶는 질문이었다. 

치열하고 기나긴 논쟁 끝에 슈뢰더는 현실 정치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고 국가를 책임진 후 변혁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마련하고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기업 등 강력한 경제적 이해집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86년 슈뢰더가 처음 니더작센 주 총리에 도전했을 때의 일화도 흥미롭다. 슈뢰더는 선거전 개막행사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내가 이 축제에서 깨달은 사실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예술과 문화가 마음껏 융성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을 보장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동부 베스트팔렌 지역 탈레 출신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아들인 나는 그날 축제 현장에서 앞으로 내가 정복해 나가야 할 신비한 세계를 체험했다.” 

좋은 국가란 정치나 경제로만 이룩되지 못한다. 문화와 예술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청년 시절 슈뢰더의 문화 예술적 체험은 스스로 고백하듯 빈곤했다. 하지만 이날 얻은 깨달음은 슈뢰더의 정치적 생애에 영향을 미쳐 뒷날에 그가 총리청에서 문화모임을 열어 예술가들과 시간을 보내는 계기가 되며, 연방정부에 문화수석을 도입하는 데 영향을 준다. 슈뢰더는 말한다. “예술가들은 내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상을 향해 눈뜨게 해주었다.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나를 성장시켰다.”

자서전에 나오는 슈뢰더의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과거에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이며, 현재 이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독일이 역사에 분명한 책임을 짐으로써 전범국가에서 문명국가로 전환해야 할 시기에 자기 자신과 독일 국민에게 던진 것이다. 

슈뢰더의 답은 이러하다. “죄를 지은 것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우리 독일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죄를 짓지는 안았지만 우리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든 세대에게 끊임없이 새롭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 없이는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마주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 독일에게 강제징용을 당했던 수백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의 고통을 배상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처음에 수억 마르크 정도로 예상했던 배상금은 시간이 지나서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100억 마르크에 달했으며, 이를 정부와 기업이 각각 절반씩 책임을 지면서 독일기업이 전 세계에서 법적 안정성을 획득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전 세계가 감동했던 것처럼,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성 없이 미래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정치인은 원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뿐이다. 이 부분에서 슈뢰더의 질문은 정확했고, 또 대답도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질문은 총리가 된 직후에 나타난다. “이제 내게 어떤 일이 닥쳐올까? 어떤 힘든 과제가 내게 주어질까? 함께 일할 사람은 누구이고, 함께 일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이제 나의 행동거지가 대중의 엄격한 감시를 받을 텐데,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소수정권인 문재인 정부에서 귀담을 만한 질문이다. 

슈뢰더는 총리가 되었지만, 과반수를 넘는 의회 다수파는 아니었다. 또 당내에서도 그의 경쟁자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했고, 협력할 사람과 적대할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파트너는 사회당에서는 오스카 라퐁텐이었고, 녹색당에서는 요슈카 피셔였다.(나중에 라퐁텐은 슈뢰더의 실용적 개혁에 항의해서 결별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작은 원칙이 제시된다. “세계 3위 경제 대국의 정부 수반에 주어지는 과제와 활동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서식지(니치)를 벗어나 스케일을 의식하면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인간만이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면, 거의 기회주의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슈뢰더의 전환은 아주 경이적이다. 슈뢰더는 말한다. “녹색당과 사민당에서는 자신의 계획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기본’에 합당해야 한다고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치 계획안이 정부나 의회의 다수로 관철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생각을 한다.” 통일 독일에 걸맞은 역할을 찾기 위해서 슈뢰더가 추진한 여러 가지 개혁안, 또는 해외에 독일군을 파견해야 하는 비극적 책임감 등은 아마도 이러한 대답으로부터 도출되었을 것이다.

이 대답은 결국 “비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이를 슈뢰더의 네 번째 질문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성숙한 문명은 전혀 원하지 않는 비극적 갈등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어떤 결정을 내리고, 이를 감당해야 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가령,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하지만 이웃나라에서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피해자가 가해자들을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일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인권 탄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지만 그들과 여러 이유로 현실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미국이라는 세계 최고의 권력이 모든 문제를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접근하는 신보수주의에 사로잡혀 거짓정보를 조작해서 이라크를 침공하려 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9.11 테러가 일어나 이른바 ‘문명사회에 대한 선전포고’가 행해졌을 때 책임 있는 국가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한 국가는 국제적 영향력이 클수록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러한 문제에 빨려들고, 선택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거짓말로 전쟁을 일으킨 부시에 대한 슈뢰더의 비판은 날카롭다. 어쩌면 이 때문에 그는 균형을 마련하려고 러시아의 또 다른 말썽장이 푸틴과 손을 잡아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보라.

“편안한 분위기였는데도 나를 계속 긴장시키고 의심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부시와 단둘이서 대화하는 내내 그가 얼마나 신을 경외하는지를 느꼈고, 심지어 최고 심판자인 신의 의견이 자신과 일치한다고 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략) 나는 신앙심이 깊고 기도로 신과 대화하며 인생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결정이 신과 대화한 결과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결정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한번 내린 결정을 변경하는 건 물론이고 조정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을 허용하는 일이 곧 기도로 신에게서 부여받은 임무를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는 동의해 아프가니스탄에 독일군을 파병하지만, 이라크 전쟁에는 단연코 반대하면서 차라리 총리직에서 물러날 결심까지 한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전쟁 반대 결정을 내릴 때,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의 논리가 평화의 논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슈뢰더는 이를 통일독일의 역할에 걸맞도록 외교정책에서 독자노선을 선택하는, 일종의 미국에 대한 독립선언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엄혹한가. 자발적 평화운동에 대한 슈뢰더의 호소에도, 미국은 끝내 이라크를 침공했고, 그 여파가 이슬람국가(IS)의 발흥으로 이어지고, 결국 시리아로 문제가 번지면서 아직까지도 참혹한 혼란이 계속되는 중이다.

다섯 번째 질문은 경제에 관한 정직하고 선명한 질문이다.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에서 사회복지가 지속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는 얼마나 더 효율적이어야 하는가?” “경제적 효용은 어느 지점에서 인간성을 파괴하기 시작하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장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전후 독일의 융성을 이룩한 이른바 ‘라인강 자본주의’는 한계에 부닥쳐 있었다. 낮은 생산성으로 인한 고질적 실업이 만연했고, 원전 등 에너지문제와 환경문제가 서로 맞섰으며, 연금 및 복지제도는 저출산 등의 현실에 맞추어 재조정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낡은 사유로는 이를 돌파하기 어려웠다. 질문이 재조정될 필요가 있었으며, 해답도 다시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 사회가 완전히 경제논리에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느 선에서 제한해야 하는가, 그리고 기업은 향상된 경제 여건을 이용하여 새로운 성장과 새로운 일자리 창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답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슈뢰더가 이 문제를 잘 풀어갔는지는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그의 파트너였던 블레어도 피차일반이다. 사회적 책임과 기업의 이윤을 조화시키는 것, 즉 세계화가 진전되어 국제적 경쟁이 일상화한 환경에서 한 나라의 경쟁력을 소실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제를 행복을 위한 디딤돌로 쓰는 것은 정치의 너무나 중요한 과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인구 대부분이 제3세계에서 사는 현실을 반영하여 이민정책을 더 개방적으로 손보고, 농업에서 과잉생산을 종료하고 농산물 생산방식을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면서 품질 경쟁을 추구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식품이 더 많아지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며,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교육을 강화하고 학교제도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며 고령사회에 맞는 노동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내부에서는 사회적 평등을 계속해서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외부 정책적 관계에서는 우리 지구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기형적인 사회적 격차를 손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적 통치’는 “시장경제가 사회적 책임을 수반할 때에만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하며, “경제성장이 완전고용, 사회정의, 환경보호에 한 쌍을 이루는 정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고뇌를 감당하면서 현실 속에서 비난받을 만한 수정을 당했지만, 슈뢰더의 신념은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자유와 연대책임 그리고 정의라는 기본 가치를 실현한다”는 사민당의 가치와 전반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자서전 역시 그러한 맥락 아래에서,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서 쓰였다. 

독일 독자를 배려한 듯, 총리 시절에는 감히 밝히지 못했을 뒷이야기와 소회를 줄줄이 늘어놓는 부분도 눈길을 끈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각국 정상과 벌였던 고도의 외교게임은 경이롭고 때때로 무섭기까지 하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필요하면 ‘정보 조작’ 등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갖춘 ‘미국’ 앞에서 독일과 같은 나라들조차 ‘독립적 의견’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 

푸틴의 ‘독재적’ 통치가 계속되는데도 풍부한 에너지 자원과 잠재시장을 갖춘 러시아를 유럽으로 끌어안으려는 푸틴 찬가와, 중동의 에너지국가와 교량 역할을 하는 터키를 어떻게든 유럽으로 포괄하려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피도 눈물도 없는 현실정치 앞에서 미국의 폭주를 견제하는 수단을 얻는 한편으로 작은 노력으로 에너지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일거양득의 묘수를 놓는 ‘대인의 정치’를 보는 느낌도 든다. 

슈뢰더의 마지막 질문은 누구나 하는 평범한 질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평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광신적 종교를 핑계로 한 인간의 희생, 폭력과 비인간성에 대한 감각의 증가” 속에서 과연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서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슈뢰더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광신주의와 테러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토양을 없애려면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물질적, 문화적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성공을 맛보고, 비폭력이 가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국가 공동체로 되돌아오는 것이 더 많은 평화와 안전, 복지와 발전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경험해야만 테러와 싸움에서 성공할 수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했던 해법도 꾸준히 유지해 가야만 한다. 

“생태학적 문제를 제어할 능력”을 얻기 위해 “미래에 에너지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애써서 “자연이 준 삶의 터전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생산된 검증된 식품을 기본으로 하는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을 개발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농업보조금을 폐지해서 전 세계 개발도상국들이 농업을 통해서라도 자유롭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여 세계화의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한 인간이 삶의 목표를 이루는 일이 점점 지식에 좌우되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아이들의 출신이나 부모의 경제력과 무관하게 모든 아이가 공평하게 교육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국가 최우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슈뢰더의 질문과 대답은 평생을 사회민주주의에 헌신해 온 한 정치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에서 소유와 표현에 관한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고, 미래 세대에게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터전을 제공하며,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정치 정당 본래의 관심사”라는 그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모두가 정치에서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